양화진 유래

양화진의 유래

양화진을 걷노라면 하나님께서 이 땅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느낄 수 있다. 묘비마다 조선을 위해 예비하셨던 주님의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이곳에 올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이곳을 외국인 묘지라고 부르기 보다는 사랑의 동산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떨까.

이 곳 양화진이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순례자들이 오고가는 기독교성지가 된 이유는 1890년 선교사 존 헤론의 죽음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당시 고종의 시의였던 존 헤론이 7월 26일 과로로 인하여 별세하자 그의 묘지를 마련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한여름의 무더운 날씨로 인하여 시신은 빨리 매장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당시 외국인 묘지는 인천에 있었기 때문에 더운 날씨와 장맛비로 인하여 시신을 운반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았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조정에 적당한 묘지를 불하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선교사들의 요청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들은 할 수 없이 헤론의 시신을 그가 살던 집 뒤뜰에 매장하려고 했다. 그러나 도성 안에 시신을 묻는 것이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고, 선교사들을 돕던 서생들까지도 반대하여 이 일도 추진하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헤론의 시신은 미국 공사관 야적장에 가매장되었다. 조선을 위해 생을 아끼지 않았던 동역자 헤론을 보내는 선교사들의 가슴은 메어졌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 죽은 헤론이 아닌가! 선교사들은 의논 끝에 외국공사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결정하고, 5개국 공사 공동명의로 양화진을 외국인 묘지로 허락해 줄 것을 공식요청하게 되었다.

당시는 외국공사들의 힘이 컸던 때라 고종은 결국 이들의 요청을 수락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종이 양화진을 외국인 묘지로 사용하도록 허락해 준 이유를 단순히 외국공사들의 압력 때문 만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고종에게도 존 헤론은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죽은 헤론은 왕실 주치의로서 고종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제중원 의사로서 일반백성에게도 헌신한 사람이었다. 이렇듯 헤론이 얼마나 힘겨운 생활을 했는지 알고 있던 왕실도 그의 시신이 편히 묻히기를 바랐을 것이다.

   양화진에 첫번째 묻힘으로 가장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한 가지 이유를 더 든다면 이는 양화진의 가슴 아픈 역사와 관련이 있다. 지금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서 강변 쪽을 바라보면 천주교 성지인 절두산이 보이는데 이곳에서 고종의 아버지인 대원군이 1866년 천주교인 1만 명을 처형하였다. 이를 역사에서는 병인박해라 부르는데, 당시에 얼마나 피를 많이 흘렸으면, 양화진 근처의 핏기가 사라지는 데에는 꽤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로 절경이 아름다워 덜머리 혹은 잠두봉이라 불리던 이곳은 절두산이라는 슬픈 이름으로 바뀌어 천주교 순교 유적지가 되었다.

고종은 이러한 가슴 아픈 역사를 바라보면서 조선을 위해 모든 생을 바친 선교사들에게 이 땅을 줌으로 속죄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고종의 허락으로 1893년에 외국인 묘지가 조성되었고, 그 규모는 4천 평에 이르렀다. 이 때 야적장에 묻혀 있었던 헤론의 시신이 3년 만에 이장되어, 헤론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힌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자료출처: 박귀용 목사의 "믿음으로 떠나는 여행", 누가성지교육원 출판사].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10.18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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