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없는 사랑, 아펜젤러

두려움 없는 사랑, 아펜젤러

아펜젤러의 묘
두려움 없는 사랑, 양화진에는 사랑을 위해서라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던 주님의 사람들이 잠들어 있다. 이들을 바라보노라면, 사랑에 빚진 나를 발견하게 된다. 아무런 대가도 필요치 않았던 그들의 마음은 실로 순수 그 자체였던 것이다. 오직 한 가지 소망,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 땅이 주님의 백성들로 넘쳐나는 그 꿈을 위해 그들은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준 것이다.

언더우드 일가의 묘를 지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양화진 언덕에 올라가게 된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 위로,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묘비가 언더우드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한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의 무덤이다. 이 무덤은 사실 빈 무덤이다. 그 이유는 그가 군산 앞바다에서 순교했기에 시신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찾아 온 한국 땅이지만, 죽음에 맞서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마지막 순간에도 이 땅의 사람을 위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랑의 사람이었다. 1902년 6월 11일 밤 10시경 그는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그의 비서 조한규와 고향집으로 돌아가던 정신 여학교 학생과 함께 배를 타고 가던 중이었다. 항해하던 배가 어청도 부근을 지나던 중 다른 선박과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나게 되었다. 배가 침몰하자 사람들은 배를 버리고 탈출하기 시작했는데, 함께 온 여학생이 그만 선실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라면 탈출할 시간이 있었지만, 그에게 조선인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했던 것이다. 아펜젤러는 소녀를 구하기 위해 다시 선실로 들어갔으나, 급격히 가라앉는 배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다.

나시사카 26인 천주교 순교기념공원 (나가사키 소재)
최근의 한국교회사가인 김수진 목사를 통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아펜젤러가 순교한 군산 앞바다는 의미 있는 곳이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군산은 한국에서 가장 기독교인 율이 높은 곳 중에 하나인데, 이는 아펜젤러의 순교의 정신이 살아있기 때문이라 했다. 의미 있는 말이다. 순교정신이 살아 있는 곳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넘쳐나는 것은 당연하다.

1885년 아펜젤러는 한국에 들어오기 직전 언더우드와 더불어 일본의 나가사키를 경유한 적이 있다. 그 때 복음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한 한국 천주교인들의 순교지를 방문하게 되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그들은 시마바라 반도에 가서 감격적인 영적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일본의 온천은 뜨거운 곳은 그 온도가 섭씨 80~90도 정도나 된다고 한다. 너무나 뜨거워 달걀을 온천물에 익혀 주기도 한다. 한국 천주교인들은 일본에 노예로 끌려간 후 고난의 세월 중에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로 포기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에도시대에 일어난 천주교인 대학살 때 운센 온천에 끌려가 물에 빠져 죽거나, 창에 찔려 죽게 되었는데, 마지막 순간에도 그들은 눈물로 기도하며 외쳤다고 한다.

 “조선 땅에도 예수의 복음이 전해지게 해 주십시오.”

 이 이야기를 들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가슴이 뜨거워지며, 눈물을 흘리며 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아펜젤러는 살아생전 이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만일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나는 한국의 모든 지방을 방문하여, 북쪽의 호랑이 사냥꾼으로부터 남쪽의 벼농사꾼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하고 싶다.”

주님은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에게 영적인 큰 선물을 주시고, 이를 통해 죽을 때까지 복음을 위한 두려움 없는 사랑을 지키도록 하신 것이다.

1885년 4월 5일 제물포 항에 언더우드와 함께 도착하고 나서 아펜젤러는 그 감격을 한국 도착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 이 곳에 상륙했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이시여!

어서 속히 이 백성을 얽어매고 있는 흑암의 사슬을 끊으시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광명과 자유를 누리게 하옵소서.”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10.19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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