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혜원 사람 알렌과 존 헤론

광혜원 사람 알렌과 존 헤론

 

양화진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존 헤론의 묘. 그는 조선을 위해 젊은 인생을 불태운 열정적인 의료선교사였다. 존 헤론은 1885년 광혜원의 의사로 이 땅에 첫 발을 딛게 된다. 당시 광혜원은 일반 백성을 위한 병원으로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통 받는 한국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광혜원의 설립은 헤론이 들어오기 일 년 전에 입국한 호레이스 알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호레이스 알렌은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1884년 9월 20일에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 기독교는 경계대상이었으므로 알렌은 선교사로서의 신분은 숨긴 채, 외교공관의 의사로 입국했다. 알렌은 당장이라도 조선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싶었지만,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고 한다.

알렌이 선교의 길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 무렵, 조선에는 커다란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우정국사건]으로, 조선의 과격개혁파인 김옥균과 박영효 등이 수구세력의 수장 격인 민영익을 우정국 개설 피로연 때 암살하기로 계획한 것이다. 그리고 1884년 12월 4일, 민영익은 칼로 난자당한 채 피를 토하며 쓰러지게 되었다.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위태함을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실력 있는 한의사들이 민영익을 살리려고 했지만, 그들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모두가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선교의 길을 위해 기도하고 있던 알렌의 마음속에 성령의 감동이 밀려 왔다.

 

“민영익을 살려냄으로 조선 선교의 길을 열리라.”

 

그러나 이 일은 알렌과 그 가족에게는 큰 모험이었다. 죽어가는 민영익을 살리지 못하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알렌은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민영익을 수술하였다. 그리고 절명의 위기로부터 민영익을 살려낸 것이다.

이 일은 한국선교사의 물꼬를 튼 큰 계기가 된다. 고종은 크게 기뻐하며, 알렌을 총애하게 되었고, 그를 왕실의 시의로 임명하게 된다. 왕실과 절친해진 알렌은 이제 선교의 길을 위해 고종에게 한 가지 청을 하게 되었다.

 

“일반 백성들의 치료를 위한 병원 설립하기를 허락해 주십시오.”

 

고종은 알렌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자기 자신을 위한 부탁도 아니요, 내 나라 조선 민족을 위한 알렌의 마음에 고종은 오히려 고마워하며, 병원설립은 물론이요 “광혜원”이란 이름도 후사하게 된다. 이 광혜원이 오늘날의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의 전신이다.

 

존 헤론은 알렌의 뒤를 이어 광혜원의 2대 원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헤론은 의학 분야에 있어서 뛰어난 실력을 보이던 사람이었다. 그는 테네시 의과대학에서 개교 이래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했을 뿐 아니라, 학교당국으로부터 교수청빙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한국선교사로서의 꿈을 꾸고 있던 자였기에. 이러한 요청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1885년 6월 21일 한국에 입국한 그는 광혜원의 원장으로 취임하고, 고종의 시의로 임명되었다. 그는 매사에 열심이었으며, 단호한 성격을 가진 터라 때로는 주위 선교사들과 마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를 잘 아는 기포드 선교사는 1897년 코리안 리포트지에 “헤론의 성격은 오래 사귄 뒤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의지적인 사람이며 자기 책임은 철저히 지켰다. 그는 의사로서 강한 희생정신과 강한 인술로써 모든 어려운 의료사업을 담당했다. 그는 절대로 불평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몸을 아끼는 법이 없었다. 그는 과로와 정신적 긴장 때문에 기진맥진하여 질병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그는 매사에 열심이며, 확고한 원칙주의자였다. 이는 광혜원의 이름을 제중원으로 바꾼 것에서도 볼 수 있다. 그는 의료를 특권층에만 베풀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 병든 자에게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에 그 이름을 “제중원”이라고 고치고, 병원을 정능 외국인 거주지에서 구리개 쪽으로 옮기기까지 한다.

헤론은 의사의 역할 뿐만 아니라, 성경번역 사업에도 열심을 다했다. 그래서 1887년 성서번역 상임위원회의 번역위원을 하기도 한다. 그는 낮에는 병원에서 의서로 밤에는 성서번역자로 하루를 24시간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을 만큼 열심히 살았다. 이러한 고된 생활이 지속되던 중 그는 1890년 7월 26일 전염성 이질에 걸려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죽기 며칠 전까지도 병든 몸으로 환자를 돌보았다고 하니, 그는 실로 한국을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친 그리스도의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그의 죽음은 조선 백성들 모두의 슬픔이었으며, 선교사들의 안타까움이었다. 양화진 외국인 묘지는 존 헤론의 죽음으로 인하여 생겨났으며, 그는 양화진에 묻힌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10.20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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