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 후에 그리스도의 사진이 된 길선주

길선주는 28세 되던 1897년 시카고 맥코믹 신학교 출신 북장로교 선교사 이길함(Graham Lee)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다음해 평양 동서문교회의 영수가 되었다. 이때부터 길선주는 신앙이 성숙되어 가기 시작했고 장래 한국 교회의 유능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약방도 날로 번창해 그의 한 달 수입은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액수인 70엔에서 80엔에 달했다. 그러나 길선주는 선교사들의 권유를 받고 번창하는 약방을 포기하고 주의 일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그때가 1902년이었다.

이듬해 길선주는 조사로 임명받아 이길함 선교사와 마포삼열(마펫) 선교사가 맡고 있는 장대현교회를 섬기기 시작했다. 그가 조사로 받는 한 달 사례는 일반 노동자의 한 달 임금에 해당하는 6엔에 불과했다. 이전에 약방에서 벌어 들이던 수입과 비교하면 십분의 일도 되지 않는 금액이었지만 기쁨과 만족은 그보다 몇십 배 더 컸다. 조사로 임명받은 길선주는 초기 선교사들이 흔히 그랬던 것처럼 평안남북도, 황해도 일대를 다니며 시골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길선주는 좀더 체계적으로 신학을 연구하기 위해 1903년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해 1907년 최초 7명의 평양신학교 졸업생 가운데 한 사람이 되는 영예를 얻었다. 1907년 9월 한국에 조직된 최초의 노회에서 목사로 안수받았고, 10월말에는 장대현교회 목사로 장립받았다. 그 후 평양에서는 물론 전 장로교회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해 선교사 중심의 교회를 한국인 중심의 교회로 전이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서울:생명의 말씀사,2007)

  • 기자명 박용규
  • 입력 2007.03.21 13:43
  • 댓글 0
저작권자 © 평양대부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