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의한 고종의 강제 퇴위(1907년 7월 24일) 

1907년 7월 24일 일본과 맺은 조약 결과 황제는 권좌에서 강제적으로 폐위되고 말았다. 대부흥운동이 한국을 강타하고 있던 바로 그때 이 민족은 가장 처절한 민족적 치욕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전 세계가 주목할 만큼 강력한 영적 각성운동이 일어나 한반도 전역을 휩쓸고 있는 바로 그때 한국인이라면 참을 수 없는 너무도 슬픈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국권을 빼앗더니 이제는 황제마저 폐위시키고 만 것이다.

민족적 울분이 그때처럼 극에 달한 적이 없었다. 김석항, 이규응, 박성환을 비롯 유생과 구 한국부대의 장교들은 1907년 정미 7조약이 체결되고 구한국부대가 해산되자 자결로서 항거했다. 심지어 신앙을 가진 이들 중에서도 국권의 상실 앞에 울분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으로 항거하는 이들이 있었다.

1907년 6월 30일에는 정동감리교회 정재홍이 일제의 한국 침략에 항거해 권총으로 자결했으며, 7월 22일에는 경기도 양주 출신 예수교 신자 홍태순(洪太順)이 고종의 강제 퇴위에 항거해 대한문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08년 3월 22일 일제의 한국 침략을 지원한 미국 외교관 스티븐슨(D.W. Stevenson)을 샌프란시스코에서 저격한 장인환(張仁煥),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만주 하르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그 거사에 동참했던 우덕순(禹德淳), 그리고 같은 해 12월 22일 이완용을 저격한 이재명(李在明) 모두 예수교 신자들이었다. 이처럼 일부 신자들은 민족적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일제에 자결이나 무력적 항거로 맞섰다.

기독교가 없었다면 이 시대 우리 민족은 힘없이 무너졌을 것이다. 기독교는 이런 가운데서도 일제에 맞설 수 있는 모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었다. 그 결과 일제 36년 동안 수많은 이들이 친일파로 돌아서는 상황에서도 교회는 이 사회와 민족을 이끄는 원동력이었다. 그 위대한 힘의 원동력은 한국교회가 경험한 대부흥에 있었다.

 

                                          박용규, 평양대부흥운동(서울:생명의말씀사, 2007)

  • 기자명 박용규
  • 입력 2007.03.29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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