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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알렉산더 윌리엄슨
2006년 06월 26일 (월) 14:22:39 관리자

   

 채프만 박사와 알렉산더

(오른쪽이 알렉산더 윌리암스)

 
비록 토마스가 한국선교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한국선교에 대한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토마스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했던 알렉산더 윌리엄슨이었다. 민경배 교수가“첫 전도자요, 복음 전파자”라고 불렀던 알렉산더 윌리엄슨은 1855년 중국에 파송되어 존 그리피스(John Griffis)와 더불어 상해에서 사역하다 건강 문제로 본국에 돌아갔다가 다시 1863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The 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의 총무로 산동반도 책임자가 되어 다시 돌아왔다.

한국선교에 대한 그의 가장 큰 공헌 가운데 하나는 한국에 관한 광범위한 자료를 수집하여 이를 토대로 1870년에 두 권으로 저술한 한국에 관한 몇 가지 설명을 곁들인 북중국, 만주, 동몽고 여행기(Alexander Williamson, Journeys in North China, Manchuria, and Eastern Mongolia; with Some Account of Corea)이다. 이것은 한국을 서구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한 몇 안 되는 서적들 가운데 꼽히는 중요한 한국관계 고문헌이다.

 

당시 산동성 지푸(Chefoo)에 거점을 둔 윌리엄슨은 다른 선교사들이 찾지 않은 내륙 지방을 탐색하며 전도하던 중 만주에서 왕래하는 한국인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윌리엄슨은 1866년 4월 요동 지방에서 한국인 상인들과 여행자들과 접촉하고 그 달 19일 북경에 왔다 귀국하는 동지사 김익문 일행을 전장대(田莊臺)에서 만나 청나라 말에 능통한 사절을 통해 그들이 북경에서 여러 선교사들을 만났다는 사실과 북경의 런던 선교회에도 다녀왔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한국선교에 대한 열의를 더욱 불태울 수 있었다.

 

동지사 일행이 만났다는 선교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 토마스였다. 토마스는 조선말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묵고 있는 숙소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따라서 다른 외국인들보다 이들 동지사 일행과 친숙하게 지낼 수 있었다. 이들과의 접촉을 통해 토마스는 이들이 기독교에 대한 상당한 식견이 있고, 적지 않은 천주교 신자들이 한국의 박해 가운데서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동지사 일행에 끼여 북경에 오는 천주교 신자들이 북경의 선교사들과 런던 선교회에도 방문해 이들과 스스럼없이 교제를 나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동지사 일행은 윌리엄슨이 접촉한 첫 한국인은 아니었다. 이미 윌리엄슨은 1865년 가을, 지푸에 있는 자신의 선교 사무실에서 두 사람의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이들은 묵주와 십자가상을 지니고 있었고, 대담 중 기도를 요청하자 그 중 한 사람이 한국말로 기도하였고, 천주교용 교리문답서를 가지고 있었다. 마침 1864년 12월 초, 런던 선교회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있던 토마스가 이 역사적인 현장에 있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토마스는 한국선교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게 되었고 1865년 9월부터 12월 사이 3개월 동안 제 1차 한국 전도여행을 실천에 옮겼다. 그만큼 윌리엄슨은 토마스의 한국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1866년 토마스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한국선교의 비전을 새롭게 다졌다. 1865년, 토마스가 순교하기 1년 전부터 고려문에서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그는“1867년에도 그곳의 한국 상인들을 상대로 전도활동”을 하며 한국선교를 준비했다. 토마스의 죽음이 한국 선교열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요인이 된 것이다. 복음은 이처럼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토마스가 세상을 떠난 지 꼭 1년이 되는 1867년 9월 9일, 고려문을 포함한 만주 전도여행을 떠났다.


고려문은 한국인이 중국에 들어가는 관문이었고 해마다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장이 섰고 이때는 한국인들이 자유롭게 들어와 중국인과 물건을 매매할 수 있는 기회가 허용되었다. 따라서 한국인들과 접촉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윌리엄슨은 한국인들에게 중국어 성경을 팔면서 복음을 전했다. 만나는 한국인들에게 기회가 닿는 대로 성경을 반포하는 것이 그의 일차적인 관심사였다. 윌리엄슨은 후에 한국인들을 만나면서 받은 인상을 이렇게 기술했다.“지시대로 나는 그 나라 많은 사람들과 만나 책자를 많이 팔았다. 그들은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무척 친절하였다.”


윌리엄슨은 한국선교에 대한 열정이 뛰어났고, 그 일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면서도, 선교의 방법에 있어서는 서구의 제국주의적 사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는 기독교 대국들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한국이 문호를 열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대영제국과 미국 같은 나라들이 선도하여 한국같이 그 나라들에 반대하여 어리석고도 무식하게 폐쇄하는 나라들을 개방하도록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군사력을 사용하는 것은 의무이자 특권이라고 나는 믿는다. 전쟁은 모든 면에서 무시무시한 악이다. 그러나 이 타락한 세계에서는 진보의 한 수단인 듯하다. 사람을 참된 문명의 광채와 완전히 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게 될 도덕적 지적, 그리고 영적 특권이라는 관점에서 그 대가는 헤아릴 수 없는 효과를 상쇄시킬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개방은 전쟁 없이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윌리엄슨은 누구 못지않은 불타는 복음의 열정이 있었지만, 선교 방법론에 있어서는 제국주의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발견한다. 비록 한국의 개방을 위해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여기지 않았지만 무력을 통해서라도 이 나라를 개방하도록 만드는 일이야말로 일종의 거룩한 소명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중국으로 박해를 피해 갔던 리델 신부가 무력을 동원하면서까지 한국의 선교의 문을 열려고 한 것이나, 토마스가 불란서 함대의 통역으로 국내에 입국하려고 한 이면에서 우리는 당시 영국과 불란서 등 유럽 강대국 출신 선교사들의 내면에 복음의 열정이 제국주의 패권의식으로 채색되어 복음의 순수성이 희석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귀츨라프, 토마스, 윌리엄슨에게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불타는 선교의 열정, 복음의 열정을 발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의 의식세계가 역시 당시 강대국 백성이 갖고 있는 제국주의적 패권의식의 한계를 크게 넘어서지 못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는 당대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복음 본래의 순수성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이들은 후대 한국선교를 위해 중요한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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