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의 성장 및 교육 배경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는 1859년 7월 19일 화학자이자 발명가인 아버지 존 언더우드(John Underwood)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그랜트 마리(Elizabeth Grant Marie) 사이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 번 쓰면 변조할 수 없는 안전수표책, 75번이나 쓸 수 있는 먹지, 그리고 타이프라이터 개량품을 착안해 낸 발명가였고, 어머니는 런던 선교회 심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고 성공회, 장로교, 침례교, 회중교회, 감리교의 연합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웰즈가 교회 담임목사 알렉산더 와우(Alexander Waugh) 박사의 손녀였다. 이 외증조 할아버지와 언더우드 사이에는 모종의 유사성이 있었다. 특히 “관대한 마음의 씀씀이, 넓은 박애심, 연합에의 사랑, 자비, 지도 및 조직의 자질, 지적인 은사” 등은 상당히 닮은 점이 많았다.

 

비록 그의 부친은 목회자는 아니었지만 종교적인 관심이 많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일생을 마친 인물이었다. 특히 언더우드는 “주의 재림에 대한 아버지의 갈망과 기다림을 완전히 물려받았다.” 주의 재림은 언더우드에게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되었으며, 1914년 한 보고서에 의하면 언더우드는 재림신앙이 강하게 담겨진 1909년에 미국에서 발간된 스코필드 관주성경을 게일과 함께 번역을 완료했다. 그는 “자신의 시대에 영광된 재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것을 멈춘 적이 없었고,” 이것은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선교사들에게도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이런 재림에 대한 희망이 한국에서 그대로 전이되어 한국교회가 재림의 신앙을 굳게 다지는 교회가 되었던 것이다. 언더우드가 다섯 살 되던 해 다섯 명의 자녀를 남기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언더우드의 아버지는 재혼했다. 그러나 자녀들에 대한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는 자녀들의 장래를 생각해 10살 된 호레이스 언더우드를 12살 먹은 형 프레드 언더우드(Fred Underwood)와 함께 불로뉴 슈메르 지방에 있는 가톨릭이 운영하는 기숙사 남학교에 보냈다. 그곳에는 영국 학생들이 있기는 했으나 주로 프랑스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었다. 이 두 소년의 신앙은 이곳에서부터 남다른 면이 나타났다.


두 형제는 기숙사에 들어오자 언제나처럼 옷을 벗고 무릎을 꿇고 조용히 기도했다. 낯선 이 모습을 보던 프랑스 소년들은 베개, 장화, 빗 등을 던지며 조소했지만 두 형제는 굴하지 않고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다. 비록 가톨릭학교라고는 하지만, 당시 불란서는 1789년 불란서 혁명 이후 급속히 진행된 기독교 후시대(Post Christianity Age)의 세속화 물결이 사회 전반에 깊숙이 침투해 반종교적인 현상이 판을 치고 있을 때였다. 이 남자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영국에서 유학 온 두 형제가 기도하고 잠자리에 들자 조소를 보낸 것이다. 처음에는 방관하던 영국 소년들이 며칠이 지나지 않아 두 형제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영국 소년들이 합류하자 프랑스 소년들도 다음날 아침 영국인들로부터 매를 맞거나 역공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무례한 행동을 자제했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프랑스 소년들도 언더우드 형제와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취침하기 전 기도하는 습관이 기숙사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어릴 때 언더우드에게는 독특한 습관이 있었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다른 일은 모두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한번은 어머니가 5달러를 주고 물건을 사오라고 심부름을 보냈는데 가게로 가면서 돈을 조금씩 찢다 가게에 도착할 즈음에는 5달러짜리 지폐가 다 찢겨 나가고 말았다. 어떤 생각에 몰입하다 자신이 물건을 사러 간다는 사실을 잊고 만 것이다. 이런 집중력 때문에 언더우드는 한번 하고자 결심한 일은 그 일이 어떤 성격의 일이든, 또 아무리 어렵고 난관에 부딪힌다 해도 그것을 뚫고 나가 결국 거의 모든 일들을 성공적으로 끝내곤 했다.


언더우드가 선교지 한국에 와서 착수한 성경 번역 사업과 문서 선교와 연합사업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1887년 아펜젤러와 함께 상임 성서번역위원회를 발족해 성경 번역을 시작한 언더우드는 성경 번역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1910년에 신구약 번역을 끝내고,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 후에도 개정 작업에 몰두하다 그만 건강을 잃고 1916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872년 언더우드가 12살 되던 때에 부친은 그의 가족을 데리고 영국을 떠나 뉴저지주의 뉴더햄(New Durham)에 정착했다. 갑작스런 사업 실패로 가산이 기울자 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것이다. 언더우드가 화란개혁교회(Reformed Church in America)에 적을 두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후에 언더우드가 보여 준 타 교단에 대한 관용, 신학적인 유연성, 동료들과의 친화, 부흥운동에 대한 열정 이 모두는 화란개혁교회에서 물려받은 유산들이었다. 이민 후 “자기의 본업인 문방구 제조에 착수하여 성공한” 아버지는 언더우드를 장차 목회자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1877년 뉴욕대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다 다시 가세가 기울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 없었던 언더우드는 20여 리나 되는 거리를 매일 걸어서 통학하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한 번도 자신의 형편을 불평한 적이 없었다. 대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대학교 재학 동안] 苦學하였고, 下學 後에는 그 父親을 도와 文房具工場에서 일도 했다. 이렇게 苦學하면서도 宗敎事業에 着念하여 酒肆遊廓으로 다니며 傳道하였고 어떤 때는 구세군을 協助하여 傳道에 努力했다. 이처럼 學資에도 困難하고 宗敎活動에도 時間을 많이 썼지마는 學業의 成績이 優秀하여 卒業時에는 卒業班 代表로 告別演說을 했다. 學業이 이렇게 優秀한 同時에 人格이 卓越하여 그 同[年]輩 中에서는 鷄群獨鶴의 風采로 指導에 當하였었다.


졸업 시 졸업반을 대표하여 고별연설을 할 정도로 우수한 성적으로 뉴욕대학교를 졸업한 언더우드는 부친이 세상을 떠나는 슬픔 속에서도 신학교로의 입학을 포기할 수 없었다. 신학교 진학을 결심한 언더우드는 1881년 자신이 속한 교회의 교단 신학교인 뉴 브룬스윅(New Brunswick)신학교에 입학했다. 1784년에 설립된 화란개혁교회(RCA)교단 신학교 뉴 브룬스윅신학교는 비록 외형적으로는 프린스톤신학교와 견줄 수 없었지만 그리피스를 비롯한 수많은 목회자, 선교사, 학자를 배출한 훌륭한 신학교였다.


언더우드는 말씀연구와 신학공부, 그리고 학비를 벌기 위한 아르바이트로 하루 5시간만 자는 고된 일과를 감당했다. 한 가지 일을 시작하면 끝장을 내고 마는 성격 탓에 그는 신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동안에도 건강은 염려하지 않고 학업에 전념하는 열성을 보였다. 이목구비가 단정한 외모에다 성실, 헌신, 영성, 그리고 지성이 하나로 어우러져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게다가 남다른 복음의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언더우드는 신학교 은사들의 인상에 깊게 남은 남다른 학생이 되었다. 언더우드가 졸업한 화란개혁신학교의 메이번(Mabone) 박사는 언더우드의 성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를 처음 본 순간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하리라. ……그를 처음 보았는데도 그의 얼굴에 나타난 어떤 목적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집념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 기자명 관리자
  • 입력 2006.06.27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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