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08월 12일/이용도와 황해노회


1930년대 한국교회는 두 가지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일제의 노골적인 신사참배와 기독교 박해로,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상의 잠입으로 한국교회는 엄청난 도전을 받고 있었다. 새로운 사상이란 서구의 자유주의 신학, 일본의 무교회주의, 그리고 이용도의 신비주의가 대표적이었다.

비록 이용도의 활동기간이 채 3년도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그가 인도한 부흥집회만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그것을 통해 한국교회에 영적인 자극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신비주의를 우려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1931년 8월 12일 장로교 황해노회는 이용도의 금족령을 결정했고, 1932년 10월에는 평양노회가 이용도의 부흥회를 단죄했으며, 1933년 9월 제 22회 장로교 총회에서는 그를 이단으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평양노회장 남궁혁 박사는 자기 노회 교회에 이용도 목사와 그 일파의 "이 영적 운동은 일봉 신비주의로서 종교신앙의 주체적 체험방면을 중시하는 것임으로 종교생활의 객관적 규범방면을 무시하며 심지어 성서 밖의 별계시와 새주의를 분연히 선전"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장로교 총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되던 그해 이용도는 감리교에서 조차 휴직처분을 받았다. 아마도 이런 결정이 없었다면 이용도의 신비주의는 더 극단으로 흘렀을 것이고, 피해도 극심했을 것이다. 어떤 인물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을 때, 특별히 그것이 신학적인 문제일 때 잘못됐다고 경고하고 그를 바로 잡아주는 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박용규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 기자명 평양대부흥
  • 입력 2007.08.01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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