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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Pritchard, Margaret Frances(1900-?, SP)
 작성자 : 박정우 조민정  2018-12-06 17:43:08   조회: 1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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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기본사항

1. 이름 : Pritchard, Margaret Frances / 프리차드 / 미국
2. 생몰연도 : 1900. 11.1- 미국 버지니아주 윔스프링 출생
4. 출신 및 소속 : 미국, 남장로교
5. 한국선교기간 : 1930 ~ 1970
6. 연표
1900.11.01 미국 버지니아주 윔스프링 출생
1919-1924 초등학교 교사로 봉직
1926 콜럼비아대학교 간호학 석사
1929 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광주 제중병원 간호부장으로 재직하며 의료선교 활동, 제중 병원부설 간호학교 설립, 초대교장으로 간호원 양성
1941 학교 폐교되며 귀국
1942-1947 미국의 오카라병원 간호부장으로 재직
1948 재내한, 전주 예수병원 간호부장으로 취임
1951 예수병원부설 간호학교 설립, 초대교장, 고아들 돌봄
1956 안식년
1957 간호학교교장 및 지역전도사역
1961 안식년
1962 간호학교 교장, 병원보조, 지역전도사역
1967 안식년
1968 간호학교 교장
1970 3월, 선교사 은퇴
1971.10.10. 새 예수병원 봉헌식
1975.12.19. 웨스터민스터 켄터베리 노인복지원으로 이사
1984 변마지의 마지막 한국 방문
1988.02.14. 영원하신 아버지의 품에서 쉼
7. 가족사항 : 기록없음


Ⅱ. 선교사 소개 (Pritchard, Margaret Frances, 1900~ )

1. 한국으로 오다

프리차드 (Pritchard, Margaret Frances, 1900~ )는 미국 남장로회 여선교사이자 간호원, 심지어 교육가로서 활약하였다. 한국명은 변마지이고, 1900년 11월 1일 미국 버지니아주 윔스프링에서 출생하였다. 콜럼비아대학교에서 간호학을 전공하였는데 1919년~1924년까지는 초등학교 교사로 봉직하였다고 알려진다. 그녀는 12살 때부터 선교사가 될 꿈을 안고 기도했는데, 한국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원하여 미국 남장로회 파송으로 1930년 처음 한국을 내한했다. 이는 당시 테네시 내슈빌에 있던 미국장로교파 주관의 세계선교이사회가 결정한 일이었다. 원래는 콩고에 가기를 자원했으나 정작 가야할 준비를 하게 된 곳은 한국이었다. 한국에의 파송에 동의하였지만 언어소통 문제로 당연히 신경이 쓰였다. 변마지는 선교활동을 위한 준비과정으로 버지니아 리치몬드에 있는 총회연수학교에서 선교봉사에 관한 수련과정을 마쳤다. 이곳을 1926년 5월에 졸업하고 9월에는 다시 컬럼비아 대학교 간호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뉴욕간호협회 등록간호사(RN)가 되어 1930년 8월에 한국에 오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이었다. 마치 바울이 마게도냐로 건너간 것처럼, 변마지 선교사는 하나님의 이끄심에 의해 콩고가 아닌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2. 광주 제중병원에서의 첫 출발

한국선교단은 그녀를 광주의 그레엄 기념병원(제중병원)에 임명했다. 이것은 훗날 광주 기독병원의 시초가 되었다. 그 당시는 병원 상황이 열악해서 7년동안 의사나 간호원도 한명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변마지가 최초의 여성 간호사로 파견 된 것이다. 그녀의 작은 시작이 한국 선교에 큰 획을 그을줄 누가 알았으랴. 병원 건물은 2층짜리 회색 벽돌 건물로 큰 방이 4개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를 수술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상황은 열악했다. 인력도 부족했다. 당시 상황으로서는 선교의사와 간호사를 병원마다 확보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힘든 상황속에서 변마지는 제중병원에서의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3. 2차 세계대전

여러 어려움들이 변마지를 힘들게 했지만,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변마지는 또 다시 사역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미국정부는 여객선을 보내 미국시민을 수송하였고 변마지도 미국으로 피난가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동료의 중요한 결혼식으로 인해 미국으로 바로 건너가지 못하고, 후에 우여곡절 끝에 일본에 다녀가는 대통령의 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4. 개원과 간호학교설립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변마지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1948년 4월 1일 마침내 병원을 열었다. 마침 변 마지가 가르쳤던 간호원 중 한 명이 전주에 살았는데, 그녀의 남편은 기독교 계통 여자 중․고등학교 교장이었다. 그녀가 간호원이 되려고 찾아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전에 일하던 보일러 기사도 병원을 도와주었고 청소 아주머니도 초창기 직원으로 고용했다. 아침마다 병원 복도에서 기도 드렸으며 입원 환자를 위한 병동을 열려고 준비하면서 바쁘게 일했다. 변마지는 병원의 어떤 분야든 기독교인만을 고용하려 했다. 이것은 변마지가 기독교 중심의 사역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복음으로 무장한 병원이 되길 원했던 것이다. 변마지의 목적은 상한 육체와 영혼을 모두 치료하는 것이었다. 병원의 병상은 모두 45개였는데 곧 입원환자로 가득 차서 보도에도 임시 병실이 설치되었다. 처음11개월 동안 7,000명의 환자들을 치료했고 338건의 주요수술을 실시했으며 입원환자는 8,000병에 이르렀다. 또한 선교회로부터 들어온 자금으로 간호학교 건물을 지었다. 보기 좋게 튼튼한 벽돌로 잘 지었는데 1층에는 식당과 주방이, 2층에는 교실과 사무실 그리고 60여명 규모의 기숙사가 배치되었다. 1950년 4월 1일 20명의 첫 학생들이 입학했다. 그리고 병원도 확장되었다. 완성 후의 규모는 침상 150개 정도였다. 이처럼 변마지의 병원 사역 및 학교 사역은 하나님께서 광주지역에 일으키신 놀라운 치유의 손길이었다.


5. 병원의 재건

하지만 시련은 늘 있기 마련이었다. 간호학교가 개원하고 학생들이 입학한지 3개월도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일어난 것이었다. 한국전쟁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민족의 아픔은 곧 변마지의 아픔이었다. 변마지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고, 한국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는, 한국과 변마지의 병원은 거의 폐허가 되어 있다 시피 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변 마지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부산항에 내려서 전주까지 280여 마일을 트럭과 짚차를 번갈아 타면서 험한 길을 쉬지 않고 달렸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전주에 가 있었다. 그녀의 마음에는 온통 병원생각 뿐이었다. 도착했을때는 한국의 친구들과 기다리고 있던 동료 선교사들이 변 마지 일행을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최소 인원으로 남아서 선교사업을 유지하던 전시 선교대원들이 모든 학교와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의 참화를 겪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의 강한 열정과 사명을 허락하셨다. 포화속에서도, 무너진 터속에서도, 그들은 다시 일어났으며, 병원을 다시 재건했고, 다시 가르치고 치유하고 전도했다. 전쟁으로 깊은 상처를 경험한 대한민국에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영육간에 아픈 백성들을 사랑하며 섬겼다.


6. 성장하는 병원과 학교

1954년 여름에 병원은 새로운 선교사들을 맞이하게 됐다. 그래서 병원은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다. 대한간호협회는 미국 민간협력 단체가 주관하는 자문단체의 도움으로 세계 보건의 날에 전국 17개 간호학교에서 실습경연대회를 주최했다. 부산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변마지가 가르치는 예수병원 간호학교 학생들이 모두 우승했다. 각 학교마다 두 명씩을 선발했는데 예수병원 학교 학생들이 일등과 이등을 차지 한 것이다. 미국 민간 협력 단체는 변마지의 간호학교를 한국에서 가장 좋은 학교라고 선언했다. 간호학교의 시작부터 변마지의 간호학교는 많은 격려를 받았다. 이것은 변마지를 향한 하나님의 인정이었다. 아무도 몰라주는 땅에서, 홀로 사명을 감당한 변마지에게 하나님의 작은 사인이 있었떤 것이다. 병원은 전도사업도 진행했다. 기독교 신자인 병원직원들과 여전도사들이 인도한 환자들과 함께 시작했는데 병원직원들이 세운 교회가 있는 마을에서 진행했다. 예배당을 세웠는데, 신학교 학생들이 여름 동안 교회당 건축을 도와주었다. 1955년 초에 서울에 있는 기독교 방송에서는 처음 방송을 시작했다. 북한에까지 복음 전파를 보냈다. 그즈음에 병원과 간호학교에서는 변마지의 한국생활 25주년을 기념해주었다. 이것은 변마지에게 매우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병원직원들과 학생들이 변마지라는 선교사를 파송해준것에 고마움을 표시한 것이었다. 그녀의 희생과 헌신은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통해 한국땅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다는 하나님의 싸인을 볼 수 있었다. 후에 예수병원 간호학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사층짜리 병원으로 건축되어져서 150개 침대를 수용할 수 있었다. 병원 복도에 여벌간이침대를 놓지 않아도 되었고 수련의와 전문의 실습교육 프로그램도 확대되었다. 기독교인 간호원들과 의사들 그리고 실험실 전문직원들의 실습과정도 잘 진행되어 병원은 물론 다른 의료기관을 위해서도 잘 훈련된 졸업생들을 배출 할 수 있었다. 1960년까지 간호학교 졸업생은 116명이었고 이들은 모두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들이었다.


7. 병원의 확장과 기숙사 건립

시간이 지나 병원 건물은 날로 황폐되어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짓거나 개조하여 쓰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다. 사람은 넘쳐났고 건물은 부족했으며 낡아가고 있었다. 간호원들이 살고 있던 숙소는 여러 가지로 형편없었다. 낡은 한옥 건물에 온돌식 난방 수단으로 석탄 가스가 새고 있었으며 어떻게 수선할 방도도 없었다. 가스가 새기도 했다. 공간이 좁아 서로 교대하면서 잠을 자야 했고 부엌 또한 몸을 구부려야 하는 구식에다가 식당도 좁았다. 오랜 기도와 후원 끝에 간호 기숙사 건물을 먼저 짓게 되었다. 변마지가 1969년에 건물의 초석을 놓았다. 병원이 올려다 보이는 언덕에 자리한 기숙사는 1970년 변마지가 퇴직하기 전에 완공되었다. 시간이 지나 변마지가 퇴직할 시간이 가까웠다. 정부의 법정 정년퇴직 나이는 65세였으나 한국정부는 공로가 많은 변마지에게 아주 호의적으로 70세까지 간호학교 교장을 맡을 수 있는 특혜를 부여했다. 그의 마지막 휴가도 예전처럼 버치니아 리치몬드의 선교의 집에서 주로 보냈다. 여러 교회를 방문하면서 지난날의 휴가 때같이 분주히 지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정년이 아직 2년이나 남아 있었으므로 변마지는 새 병원 건축을 시작해야겠다고 작정했다.1970년 그의 퇴직에 따라 간호학교 교장을 맡은 켈러 부인은 문교부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크레인 박사 가족은 개인적인 이유로 1969년에 퇴직하고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병원에는 데이비드 실 박사가 원장으로 남아있었다. 크레인 박사는 새 병원을 짓는 데 추진력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8. 그녀의 마지막

변마지는 지난 50여년을 뒤돌아보며 오직 주의 일을 수행하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명예를 돌리고, 사람들이 기대한 것 이상으로 의료선교사업을 축복하신 것에 감사드렸다. 정년퇴직후 그녀는, 10년 동안 허락하신 봉사활동과 1930년부터 1970년까지 40년 동안 한국에서 선교간호원으로 봉사한 것이야말로 그녀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값진 일이었음을 확신했다. 그녀는 마지막이 가까올때쯤, 병원 침상에서조차 그리스도 정신에 기초를 둔 고결한 성품을 유지하여 결코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과 영화롭게 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그녀의 조카딸 진(Jean)이 회상하건대, 어느날 아침에 변마지는 아름다운 귀향을 준비하신 하늘 아버지의 영원한 은총에 관한 꿈에 흥분되어 한 시간 가량을 찬송했다고 한다. 그날 밤 침대가에 한 사람씩 다가서게 하고 승리하는 영혼의 영감을 같이 나누었다. 서준덕 목사가 찾아와 그녀의 손을 잡을 때 두 눈은 빛나며 밝아졌고 평강과 담대함과 위로를 주시길 기도했다. 그녀는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하나님만이 알아들으실 수 있는 매우 아름답고 감동적인 기도를 하고 몇 시간 뒤 고요하고 평안하게 잠들었다. 1988년 2월 14일 새벽 2시 15분, 발렌타인데이였다

그녀는 실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한국에 보내진 수많은 여성 선교사들 중에 한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의 발자취는 오늘도 우리 곁에 생생히 남아있으며,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군사 쿠데타 등, 한국 근현대사의 격변의 중심에서도 뒷걸음치지 않았다. 시대의 어려움을 핑계삼아 사역을 멈추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갸날픈 온 몸으로 격변의 시대를 마주했고 대한민국을 품어냈다. 그녀는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빛을 발하는 복음의 능력을 믿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외치며 복음을 전했던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녀의 발자취는 오늘도 전주 예수대학과 예수병원등 한국 선교 역사에 자랑이며, 그녀의 사랑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면류관이다.
2018-12-06 17:4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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