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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Gilmer, William Painter(1890-1978, SP) / Newman, Kate
 작성자 : 김성은, 서선경  2018-12-06 23:59:02   조회: 1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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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머 선교사 부부- Gilmer, William Painter (1891-1978)- Newman, Kate / (1891-1926)

Ⅰ. 기본사항
- Gilmer, William Painter
1. 이름: Gilmer, William Painter / 길머 / 한국명: 길마(吉瑪)
2. 생몰연도: 1890.5.26.-1978.7.4.
3. 출신 및 소속: 미국, 북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923.-1927.
5. 연표
1890.5.26. 미국 버지니아주 Clifton Forge에서 출생
1908. 햄프던시드니대학교 입학
1910. 햄프던시드니대학교 졸업(학사)
1910. 햄프던시드니대학교에서 2년간 강의
1912. 버지니아주립대학교 의학부 입학
1916. 버지니아주립대학교 의학부 졸업(석사)
1923. 한국 입국
1923. 목포 프렌취기념병원에서 의료사역 시작
1924.6.3. 캐슬린(Kathryn)와 결혼
1926. 광주기독병원에서 의료사역 시작
1927.2. 캐슬린(Kathryn)의 여동생 헬렌(Helen ElizabethNewman)과 재혼
1927.6. 선교사 사임 뒤 미국으로 귀국(딸 출생 뒤 18개월 후에 출국)
1928. 미국 버지니아주 Clifton Forge에서 병원장 역임
1978.7.4. 미국 버지니아주 Clifton Forge에서 사망
6. 가족사항
부인: Gilmer, Kathryn Newman (1891-1926)
Gilmer, Helen Elizabeth Newman (1903-1990)
딸: Gilmer, Kathryn Newman (1926-2013) (첫 번째 부인 Katryn 사이에서 낳은 자녀)
Young, Philip Betty Jean (두 번째 부인 Helen 사이에서 낳은 자녀)
Meeks, Douglas Blair (두 번째 부인 Helen 사이에서 낳은 자녀)

- Gilmer, Kathryn Newman
1. 이름: Gilmer, Kathryn Newman / 캐스린
2. 생몰연도: 1891.12.12.-1926.3.27
3. 출신 및 소속: 미국, 북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924.-1926.3.27.
5. 연표
1891.12.12. 미국 미시시피주 Baldwyn에서 출생
1923.8.28. 한국 입국
1924. 목포에서 어학사역, 지역전도사역
1924.6.3. 길머(Gilmer)와 결혼
1926. 광주에서 어학사역, 선교사자녀 교육교사로서 사역
1926.3.16. 목포 (Presbyterian mission Hospital) 병원에서 딸 Kathryn 출산
1926.3.27. 목포에서 뇌출혈로 사망. 광주 양림동 호남신학대학교 내 선교사묘역에 인장됨.
6. 가족사항
남편: Gilmer, William Painter(1890-1978)
딸: Gilmer, Kathryn Newman (1926-2013)


Ⅱ. 선교사 소개
1. 뜨거운 헌신과 뛰어난 실력으로 의료 사명을 감당한 Gilmer.
길머(W. P. Gilmer, 1890-1978)는 미국에서 버지니아주립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시 의무장교로 임관되어 독일전선에서 부상병을 치료하기도 하였다. 그는 세계대전이 끝나자 예편하여, 1922년 의료선교사로서 미국 남장로교 소속으로 파송 받아 내한하게 된다. 그는 의학 공부와 의무장교로서의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 남장로교회가 설립하고 경영한 목포 프렌치기념병원(French Memorial Hospital)에서 의료사역을 감당한다.
목포 프렌치기념병원은 미국 성도들의 헌금으로 세워진 병원이다. 1914년, 리딩햄(R. S. Leadingham; 한삼열)이 병원장으로 근무하던 목포 진료소가 화재로 모두 전소되고, 한국인 조수 윤병호가 순직한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다. 당시 해외선교부 총무였던 체스터(Samuel H. Chester)는 해외 선교자금을 큰 병원 건립에 투자하는 것에 소극적이었고, 그의 의료사역에 대한 정책에 따라 선교부 차원에서 병원 설립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미국의 미주리 주 프렌치(Charles W. French)의 유산과 St, Joseph 교회 성도들은 헌금을 모아 보내줘 병원 신축이 가능하게 되었다. 1916년 병원이 완공되었고, 리딩햄은 11년간 의료선교하다 1923년에 귀국하였다. 이 후에 길머가 프렌치기념병원의 병원장을 맡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 정보의 가능성은 높은 것으로 보인다. 길머가 의료 면허를 따기 위해 일본으로 한 달 정도 병원을 떠나 있을 때 병원 문을 닫고 갔기 때문이다.
목포 프렌치기념병원은 매년 7천명에서 8천명의 조선인이 이용한 병원으로, 이는 당시 병원 중 조선인이 가장 많이 이용한 곳이다. 길머는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땀을 흘리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수술은 하루에 2-3건 정도가 있었는데 모두 어려운 수술들이었다. 환자의 종기를 제거하다 도살장에서 온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쓰기도 하고, 2시간 동안 수술하느라 온 몸이 마른 곳이 없이 땀을 흘리도 할 정도였다. 그의 헌신이 얼마나 뜨거운지 절실히 느껴진다.
수술뿐만이 아니라 진료 시간은 꽉 차 초과할 정도였고 다양하고 잡스러운 일들에 대한 요청이 100건, 병원 밖에서 가정 치료를 받는 환자도 26명이나 되었다. 부인과 오후 내내 함께 있는 것이 신혼여행 다녀온 지 10개월 만에 처음으로 가능했으니 얼마나 병원일이 정신없었을지 그 분주함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일요일에도 병원에 두 차례 방문했다고 하니 휴일 없이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매달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환자가 많았던 이유는 길머의 뛰어난 의료 실력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려운 수술을 성공시켰다는 소문이 퍼지자 환자나 광주에 있던 선교사들이 멀리서 찾아오기도 할 정도였다.
길머가 이토록 의료 사역에 힘 쓴 이유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인들은 배가 아프면 그 속에 거북이가 들어있기 때문이고, 사람이 죽으면 무당을 불러 2시간씩 굿을 해야 영혼이 돌아올 수 있다고 믿었던 무지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길머가 모든 수술을 성공시키고 죽어가는 환자를 살려야만 선교사들이 전하는 하나님과 진리가 진짜이고, 그렇지 않으면 가짜라고 생각했다. 길머는 하나님과 진리가 진짜임을 조선인들에게 보이기 위해 생존율이 낮거나 위험도가 높아 불가능해 보이는 수술이더라도 감행해야만 했다. 앞서 살펴본 길머의 뛰어난 실력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일이라 생각된다. 길머가 자신의 의료를 통해 하나님을 전하길 원한다는 그의 절실함과 간절함을 기뻐 받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더욱 힘을 실을 수 있는 것은, 길머가 병원 환자들 중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데에 힘썼다는 것이다. 그는 친근한 방법으로 다가가 하나님을 전했고, 장기 입원 환자의 경우 오히려 회복된 이후에도 병원을 떠나게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경우가 종종 있을 정도였다. 또한 길머는 가족이 환자를 병원에 데려가기를 거부하자, 환자를 살리기 위해 몰래 빼온 적도 있었다.
하지만 병원의 상황은 날로 힘들어져만 갔다. 병원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월 1천 2백엔이 필요하지만 선교위원회에서는 3백 엔만 지원해주는 상황이라 병원은 늘 적자를 피하지 못했다. 물론 첫 수지를 경험했기도 했지만 곧 직원 몇 명을 해고해야할 정도로 힘들어졌다. 그럴수록 길머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이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길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상황 속에서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치열하게 힘쓰던 자였다. 또한 자신의 의료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조선인들이 주님께로 인도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자였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목포에는 선교 병원을 반대할 수 있는 온갖 잠재적 모습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이는 길머가 병원을 떠난 이후, 남장로교 선교부는 프렌치 병원에 1931년까지만 의사를 파송했고. 그 이후에는 선교사를 보내지 않고 한국인 의사들로만 병원을 운영했다. 특히 본격적으로 일제의 기독교 탄압이 심해지면서 선교사들이 추방되었고, 인력 부재와 재정부족으로 날이 갈수록 어려움을 겪었다. 1940년까지 운영이 지속되긴 했지만, 일제 치하와 해방을 지나면서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채 병원 건물은 소리 소문 없이 소멸되고 말았다. 미 남장로교 호남 선교부의 기독병원들이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에서 크게 기여하며 온전히 전통과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데, 5개 선교부 가운데 유일하게 목포의 기독교 프렌치 병원의 명맥만 끊어져 버린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길머는 1926년 목포에서 함께 사역했던 동역자이자 아내인 캐스린과 사별한 18개월 뒤, 미국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처제였던 헬렌(Helen Elizabeth Newman, 1903-1990)과 재혼한다. 당시에 젊은 홀아비와 그의 처제와 재혼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히려 캐스린은 편지를 통해 동생에게 자신의 남편과 같은 남자를 만나라고 몇 번이고 강조했고, 캐스린이 어머니이자 길머의 장모님 또한 길머를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 하여 다른 딸들에게 청혼하는 후보들이 성에 안 찰 정도였으니 이 둘이 재혼하게 된 것은 모두에게 행복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많은 편지들을 통해 이미 선교적 비전을 공유하고 서로 성품들을 간접적으로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 영혼을 사랑함으로 복음 전파에 힘쓴 Kathryn.
캐스린(K. N. Gilmer, 1891-1926)은 미국 미시시피주 볼드윈에서 출생하여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코린트에서 교직에 종사하다 1923년 미국 남장로회가 한국에 파송한 교육선교사이다.
그녀는 선교사로 선임된 후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왔다. 이 기간은 단순한 여정이 아니라,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굳건히 하는 사건이 있었다. 일본에 체류할 때 일본관동대지진이 일어나는데, 캐스린은 4일 전에 해당 지역을 벗어나 지진을 피할 수 있었다. 그녀는 지진에서 목숨을 건져주신 주님의 은혜를 느끼며 주님의 일을 할 때 주님께서 그들을 돌보신다는 믿음이 강해졌다.
그녀는 밝은 에너지가 가득한 사람이었다. 팔이 부러질 때도 비명을 지르지 않거나 농양이 있는 치아를 뽑기로 동의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그녀의 활기 넘침에 놀랄 정도였다. 또한 그녀는 그만큼 솔직함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 솔직함은 지나치다 못해 마치 선교사로서의 사명감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부산에 발을 처음으로 딛자마자 마주한 조선의 모습을 보고 1년 정도만 있다가 일본에서 유치원생을 가르치고 싶다거나, 조선을 더럽고 볼품없는 이교도 땅으로, 조선인은 슬프고 바보 같으며 괴상하고 추한 사람들로서 표현한다. 한센인들이 구걸하는 것이 짜증나는 일이라고 표현한 것을 볼 때면 그녀에게 긍휼과 사랑이 있는 것일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만큼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사람이었으며, 조선의 현실과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조선인들을 불쌍히 여겨 오직 복음 전파에 힘쓰는 자였다. 이는 영혼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겠다고 결단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그녀가 매 일요일마다 했던 사역이다. 그녀는 일요일마다 조선말 예배, 영어 예배를 모두 참석했는데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10시 30분에 조선인 교회에서 조선말 예배를 2시간 동안 드린 후에, 산 넘어 3.2km 떨어진 곳에서 1시 30분 주일학교 예배를 섬기고, 다시 본교회로 돌아와 4시 30분에 영어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다. 이후 그녀가 임신했을 때에는 새 주일학교에 가기 위해 6km 되는 거리를 차로 이동하고 언덕과 골짜기 걸어 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미국 여자인 자신이 가면 사람들이 신기해서라도 15분 만에 100명이 모여들기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주로 선교사 자녀들을 가르치거나 주일학교 아이들을 담당했다. 천국에 조선말이 없기를 바랄 정도로 조선말이 너무나도 어려웠지만, 4.3x4.9㎡ 방에서 100명 정도가 모일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도 아이들을 가르침에 힘썼다. 특히 조선 아이들이 매우 좋아하는 미국 그림카드 뒤에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적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방법을 통해 말씀을 전했다. 성경학교에서 음악 수업을 맡아 풍금 치기도 했으며 여성 200여명이 모인 성경공부반에서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가르쳤다. 심지어 조선 북부에서 홍수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후원금을 모집하는 콘서트에서 독창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남편 길머와 버금가는 많은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 영혼을 향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길머 또한 캐스린의 열정적인 사역과 그녀가 미친 선한 영향력을 보고 아내로 맞이하겠노라고 결정한 것이었다. 길머는 그녀에 대해 말하기를, 목포 아이들의 훌륭한 발전이 그녀의 능력과 좋은 자질에 대해 증거하고 있으며, 책임지고 있는 아이들을 훈련시키고 그들과 관계를 맺은 결과만으로 멋진 여성이라고 밝혔다.
선교사로서의 삶은 너무나도 궁핍하고 가난했다. 하지만 그녀는 선교사로서의 사명에 자신의 온 삶을 집중하고 모든 생활도 이에 맞췄다. 길머의 병원은 매달 적자였고, 후원하는 조선인 의대생도 있었다. 집은 비가 샐 정도였는데, 선교부에서 지원하는 집 유지보수비는 실제 지출 비용의 1/365도 되지 않는 연간 15달러뿐이었다. 덧신은 완전히 닳아 쓸 수 없고, 스타킹은 구멍이 숭숭 났으며. 예쁜 물건들을 사고 싶은 욕구도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필요와 생활은 뒷전으로 두고, 성경을 구입해서 조선인들에게 전하고, 학생들을 도우면서 복음 전파의 선교사적 사명을 감당하는 데에만 힘썼다. 빈약한 월급은 늘 바닥을 보였음에도 사역을 먼저 행한 것은, 오랫동안 무지 속에서 살아온 조선인들이 이제야 주님의 역사 안으로 들어올 길과 소망을 발견한 것인데 멈출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그녀는 무속신앙인 이교도를 따르는 조선인들을 불쌍히 여겼으며, 어둠 속에 속한 조선인들을 안타까워했으며, 조선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빛의 자녀가 되면 그 누구보다 기뻐했다.
하지만 이토록 한 명의 구원을 위해 힘쓰던 때에 먹구름이 다가왔다. 교회에도 변절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나이든 신자들의 믿음은 참으로 진실하고 변함없어서 오히려 캐스린이 부끄러워질 정도였으며, 그들이 열정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은 눈물을 나게끔 했다. 하지만 그 다음 세대인 젊은이들은 종교 없는 교육만 추구하며 교회에 문제를 만들고 있어 캐스린에게 방해가 될 뿐이었다. 심지어 남장로교가 아닌 어떤 선교부는 정통이 아닌 선교사들을 보내 그들의 근대주의가 조선 사람들을 빠르게 장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오랫동안 어둠 가운데서 살아 온 이 사람들이 이제 올바른 길을 발견하고 알게 되는 기회를 가졌는데,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파송을 받아와서 ‘그런 따위’를 가르치는 것을 보며 캐스린은 마음이 찢어졌다. 모든 선교위원회의 자칭 이사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한탄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양들에게 생명의 꼴을 먹이며 온전한 길로 이끌고자 하는 선한 목자의 모습을 엿 볼 수 있다.
3. 복음주의 신앙 위에 굳건히 세워진 부부.
길머 부부는 복음주의 신앙을 바탕으로, 완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그분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따르는 자였다. 그들의 삶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었다.
이는 먼저 그들의 농담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과 이행되는 시기인 섭리를 믿는 복음주의 신앙을 살펴볼 수 있다. 캐스린의 출산일이 가까워졌을 때 진통이 왔지만, 길머는 “훌륭한 장로교인이라서 때가 되기 전에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캐스린의 신앙은 부모로부터 이어진 것이었다. 캐스린의 언니가 부모에게 캐스린의 결혼이 너무 이른 것이 아니냐고 물어봤을 때에, 아버지(Charles Forest Newman, 1864-1920)는 진짜 장로교인으로서 “일어날 일은 일어날 것”이라며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내포한 반면, 감리교인 어머니(Elizabeth Olivia Pearson, 1865-1937)는 ”어느 정도의 상식을 연습하고 아니, 아니 외치면 무한정 연기될 수 있다“며 인간의 영향력을 포함했다. 또한 캐스린의 오빠는 감리교 설교자인 것을 보아 장로교와 감리교가 한데 어우러지는 복음주의권 신앙이 배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다음의 일련의 일들을 보았을 때 캐스린은 어머니와 달리 ‘진짜 장로교인’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그에 따르는 자였다. 실내로 된 주일학교 장소가 필요했고, 부부는 마가의 다락방을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열심히 기도했다. 그 후 길가다 만난 사람이 예수님을 믿겠다는 약속과 함께 주일학교 위해서 방을 내주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특히 그 방은 100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캐스린은 이 일을 회상하며 수많은 신자들에 대한 소망으로 마음이 부유해지며, 이것이 자신들이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가 있을 때 모든 일을 놓고 애쓰는 이유라고 말한다. 캐스린의 이 고백을 통해 그녀의 삶의 목적이 영혼 구원이며, 삶의 우선순위가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일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선에서 생활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길머는 과중한 병원 업무와 매번 적자인 재정 상태 때문에 힘들어했다. 본국에서 같은 일을 하면 더 안락할 수 있다는 걸 알았기에 조선에서의 의료사역은 더욱 고되게 느껴졌다. 길머는 이에 대해 “끔찍한 나라에 왜 머물러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이어서 “하나님께서 이 일에 저희를 불러주셨고 행복하다”라고 고백한다. 인간이기에 역경 속에서 너무나도 견디기 힘들지만, 하나님의 부르셨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것이 족하고 행복하다는 것이다. 길머의 삶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셨고, 모든 일의 관점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이는 그의 아내 캐스린이 딸을 낳고 단 11일 만에 죽은 때에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캐스린이 죽음은 참으로 예상 밖의 일이었다. 딸을 건강하게 낳은 뒤 잘 먹고 잘 쉬며 산후조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캐스린이 밥을 먹다가 다리에 통증을 느껴 방으로 이동했는데, 그 뒤 손 쓸 사이도 없이 죽고 말았다. 다리에 있던 혈전이 뇌에 박힌 것이다. 의사이며 수많은 환자를 치료했던 길머에게는 아내의 죽음이 더욱 허망하고 잔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길머가 이 때 쓴 편지에는 그 고통이 절실하게 나타나지만, 그 보다 더 강한 복음주의적 신앙이 진하게 나타난다. 이에 대해서는 그의 편지의 번역을 그대로 옮긴다.
“… 때로는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하기 힘든 때가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가 무한하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죠. … 이건 견디기 힘든 일이에요, 그렇죠?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족합니다.
진정 하나님은 피난처이십니다. … 이 시험은 견디기 매우 힘들지만 하나님의 목적의 일부이고, 왜 시험을 보내셨는지 그 이유를 제게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제게 참으로 좋으신 분이시고, 키티가 고통 없이, 의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상황에서 갔다는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 저희 모두가 함께 있어 절대로 갈라지지 않을 그 때가 멀지 않다는 것도 아실 것입니다. 그 복된 진리가 저를 지탱해 줍니다. 저희가 약속의 때를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저희들에게 그분을 증언하는 일을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앎에 이르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아기를 데리고 두 분께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지만 성령의 이끄심은 아무래도 최소한 당분간은 이곳에서 사역 가운데 머물러야 한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요즘 조선의 상황이 가망이 없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습니다.
그 일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직접적인 부르심이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계시된 진리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제 심장이 있고 또한 있었다고 믿도록 가르침을 받은 곳에서 겪는 이 극심한 고통을, 저는 이 진리로 인해 견디게 됩니다.“
그는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뜻하신 바 이루시고 이루신 바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였다. 왕이신 하나님은 그분의 뜻에 따라 계획하시고 일하시며, 그 모든 것이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으며, 그의 피조물로서 순복하고 따르는 자였다. 마치 요셉이 이해되지 않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직 있는 자리에서 그의 뜻을 기다렸던 것처럼, 길머는 미국으로 가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고 성령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는 자였다. 물론 이후 딸 케스린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고, 다른 누군가가 이 일을 이어받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1927년 선교사를 사임한 뒤 한국을 떠난다.


4. 믿음의 가정을 세우는 데에 일조한 Gilmer.
길머는 목포에서 최섭(崔燮)을 도아 그를 의사로 만드는 데 공헌하였는데, 최섭은 해방 후 미군정 시절 목포 초대 시장을 역임했으며, 목포 양동제일교회 장로이면서 목포 프렌취병원 원장 의사, 또 목포 정명여자중·고등학교를 역임하기도 한 재원이다. 또한 최섭 장로의 아들인 최상춘은 서울 은광교회 원로 장로이기도 하니, 이처럼 3대째 장로 유업이 이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 가정의 믿음의 뿌리가 깊고 신앙의 유산이 대대로 전해졌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최섭의 아버지인 최병호가 앞서 있다. 최병호는 맥콜리(H. D. McCallie, 맹현리) 선교사를 통해 하나님을 영접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후 완도 관신리에서 순교했던 믿음의 선배이다.
그러나 캐스린이 작성한 수많은 편지들 속에서 길머가 조선인 후계자를 양성하기 위해 얼마나 애써왔고 헌신했는지 볼 수 있다. 최섭이라고 정확하게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정황상 동일인물로 볼 수 있는 근거들이 있다. 먼저 길머의 통역사로 있던 조선인 2명의 이름이 이모기(Emogi)와 수비(Subbie)가 있었는데, 이 중 ‘수비’가 최섭의 ‘섭’을 영어식으로 발음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이 통역의 일 뿐만 아니라 수술과 같은 의학적 일을 시도한 것으로 볼 때 더욱 그러하다. 또한 길머에게는 의학전문학교에 자비로 보내어 언젠가 그가 미국으로 돌아갈 때 병원을 맡길 수 있는 조선인 후임자를 양성하고 있었다. 앞서 살펴본 대로 길머가 최섭을 의사로 만드는데 공헌하였다고 표현할 정도이면, 의학을 공부하는 데에 후원한 것과 무관해보이지 않는다.
2018-12-06 23:5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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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13 / Frey, Lulu E.(1868-1921, M)   구교찬     2020-07-08   4
1676
  내한선교사 / 45 / Hunt John K   2반 이요한     2020-07-08   8
1675
  내한선교사 / 27 / Hanson, Marjorie(미상, M).   문끄리스띠안     2020-07-08   15
1674
  내한선교사 / 28 / Hard Theodore   박성전     2020-07-08   6
1673
  내한선교사_42_Hoffman Clarence S.   3학년 2반 이상재     2020-07-08   5
1672
  내한선교사/57/McLellan, E. A.   조혜진     2020-07-08   19
1671
  내한선교사 / 49 / Keller Frank Goulding   임예창     2020-07-08   12
1670
  내한선교사/ 55/ MacRae, Frederick John Learmonth(1884-1973, AP) / MacRae, M. Hall   조동진     2020-07-08   7
1669
  내한선교사_12_Fraser, Edward James Oxley(1878-1977, CP) / Fraser, E. J. O. (Mrs.)   강예권     2020-07-07   7
1668
  내한선교사 / 18 / Goodsell Daniel A   김세현     2020-07-07   10
1667
  내한선교사 / 38 / Nelson Augustus Bryan (1)   손성원   -   2020-07-07   9
1666
  내한선교사 / 48 / Jones, George Heber   이호빈     2020-07-07   9
1665
  내한선교사 / 62 / Moore, James H.   현종훈     2020-07-07   1
1664
  내한선교사 / 9 / Forsythe, Wiley Hamilton   윤석인     2020-07-07   5
1663
  내한선교사/36/Henderson Lloyd Putnam   양승희     2020-07-07   11
1662
  내한선교사 / 58 / McPhee, Ida   주영찬     2020-07-07   12
1661
  내한선교사 / 51 / Swanson, Ererett E   김민석     2020-07-07   27
1660
  내한선교사 / 35 / Helstrom, Hilda L.   안상구     2020-07-07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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