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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Cutler, Mary M.(1865-1948, M)
 작성자 : 김지성, 곽사무엘  2019-07-03 02:17:42   조회: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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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틀러 선교사 / Mary M. Cutler (1865-1948)

I. 기본사항

1. 이름: Cutler, Mary M. / 커틀러 / 한국명: 거달리
2. 생몰연도: 1865.12.12. - 1948.4.27.
3. 출신 및 소속: 미국, 감리회(북)
4. 한국선교기간: 1892 - 1939

5. 연표 : 1865.12.12. 미국 미시간주 그랜드래피즈 커틀러빌(Cutlerville)의 한 농장에서 출생1888 미시간 대학병원, 여성병동에서 간호사로 활동1889 미시간 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이후 3년 동안 오하이오주 포머로이에서 실습, 연구 과정후, 의학박사 학위 취득1892 미 북감리회 의료선교사로 내한 (1893.3.1. 서울에 입국했다는 자료도 있음) 정동 보구여관에서 9개월간 홀 부인(R. S. Hall)과 진료활동1893.3. - 1897 보구여관의 분원 동대문볼드윈 진료소(Baldwin Dispensary)에서 왕래 하 며 진료1894.5. 제 3대 보구여관 관장 여의사 (1912년까지 20년 동안 보구여관 책임) 이화학당의 교의를 겸하여 학생들의 건강지도, 질병치료1895.9.11. - 1895.11.17. 요양(일본)1898.8.25. - 1898 연말. 지방순회진료1901 봄. - 1903.3. 안식년1903 에드먼즈 간호사의 주도와 커틀러와 홀의 도움으로 간호사 양성학교을 개교1909.3. – 1909.12. 안식년으로 귀국 신학연구에 몰두, 전도자 훈련1911 의사, 간호원 양성소 감독, 보구여관 전 기관의 관리자로서 어려움을 토로 여성해외선교회에 간호사 양성학교의 책임질 수 있는 간호사 파견을 요구1912.3. 홀 부인이 설립한 평양 광혜여자병원으로 이전. 지방 순회 진료 활동, 성경공부지도. 여의사 양성.1918 광혜여자병원의 병동신축을 위한, 한국선교 25주년 기념식을 앞두고 기부금 모금1919 조사, 정책 및 표준화 연구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 (북 감리회 대표)1931.6.14. 제1회 연합연회에서 한국최초의 여자목사 안수1933.6. 은퇴 (은퇴 후에도 계속 한국에서 의료봉사와 전도활동)1939 귀국. 귀국 후, 그랜드래피즈의 클라크 메모리얼 요양원에서 거주1948.4.27. 사망

6. 가족사항 : 독신. 두 명의 형제와 한 명의 자매


II. 선교사 소개: 커틀러(Mary M. Cutler, 1865-1948)

1. 미국의 젊은 여의사가 한국이란 낯선 땅으로 오다
Mary M. Cutler(커틀러)는 1865년 12월 12일, 미국의 미시간주 그랜드래피즈, 커틀러빌의 한 농장에서 태어났다. 커틀러는 그랜드래피즈 고등학교를 졸업 후, 미시간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진행했고, 1889년에 졸업하였다. 3년 뒤, 그녀는 젊은 의사로 한국에 미 감리회 소속 여의사선교사로 파송을 받는다.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에서 볼 수 있듯이, 커틀러 선교사는 늘 여성과 어린이들을 향한 의료 선교사역에 치중하고자 했다는 사실이 다양한 기록들에서 나타났다. 그녀는 특히, 남녀의 사회적, 문화적 차이를 인지하고 사역하였는데, 이러한 차이를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미시간 의과대학에서 졸업하기 전, 대학 병원에서 1년 동안, 특별히 여성병동에서 간호사로 일했기 때문이다. 이미 미국에서부터 여성들을 향한 그녀의 의료적 경험은 한국에서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녀가 결혼했다는 기록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을 이루어 볼 때, 독신으로 한국에서 오랜 시간동안 선교사역을 진행했다는 점 또한, 그녀가 여성을 향한 사역에 집중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소였다. 커틀러의 선교사역은 크게 두 개의 기점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의료 선교사로서의 전반기를 정동의 보구여관의 사역으로 보냈고, 그리고 후반기를 평양 광혜 여자병원에서의 사역으로 나눠질 수 있다. 대학 졸업 후, 그녀는 의사로서의 커리어를 쌓기 보다는, 연구와 실습에 집중하였으며, 정작 박사학위 취득 후에는 곧바로 한국으로 파송 받았다. 그녀는 젊음과 미국에서의 안정된 미래를 포기하고 한국이란 낯설고 어두웠던 땅에서 약자들을 돌보며 복음을 전하고자 했고, 한국 기독교 역사에 보이지 않지만 큰 영향력을 끼쳤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할 것이다.

2. 보구여관에서의 사역(1982-1912)
커틀러의 사역의 가장 중심을 이루는 사역은 아마 보구여관에서의 사역일 것이다. 1892년, 커틀러는 서울 정동의 보구여관의 로제샤 셔우드 홀에게로 파송 받아, 9개월 동안 그곳에서 섬겼다. 그리고, 그녀는 곧 메타 하워드와 로제타 홀을 뒤이어, 1893년 보구여관의 제 3대 관장으로 선교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약 20여 년 동안, 평양 광혜여자병원으로 떠나기 전까지 그녀는 수많은 여성들을 열심히 치료했고, 그곳에서 예수의 사랑을 전했다는 사실은 당연히 기억되어져야 한다.
보구여관은 “북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에서 여의사를 파견하여 여성만을 치료하였던 한국 최초의 여성전문병원”이다. 당시 한국은 남녀의 사회적 문화적 간극이 너무나도 컸는데, “대다수의 여자 환자들은 남자 의사에게 진찰받는 것을 마음 내켜하지 않았고, 언제 여의사가 올 것인지를 자주 물었다”고 한다는 점을 돌이켜 볼 때, 커틀러와 같은 여성 의료선교사의 역할을 실로 너무나 중대했다. 그리고, 커틀러가 관장했던 보구여관에서는 환자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보구여관에서 하루 동안 진료와 치료를 받았던 가장 많은 여성 환자의 수는 45명까지였고, 평균 18명의 환자들이 있었다. 여관은 그렇게 크지 않았고, 의사와 간호원 숫자가 터무니없이 부족했지만, 커틀러는 열정으로 의료사역을 해내갔다. 때로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의료선교가 복음을 전하는데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보구여관에서 “모든 환자들은 진찰을 기다리는 동안 대기실에서 성경부인이 들려주는 예수의 이야기”를 들었다. 뿐만 아니라, 커틀러가 환자들을 대하는 모습은 분명 겸손과 헌신이었고, 이로 인하여, 수많은 한국인들은 그녀의 삶 속에서 나타난 예수의 사랑에 대해 접하고 느꼈다. 그녀는 외국인을 거부하려 했던 환자들을 기다렸고, 설득하며 진료했고, “일주일 동안 산고를 치루고 있는 부인을 치료하기 위해 20마일을 가서 수술”하려고 했지만, 외국인에게 치료받는 것이 “죽음보다 부끄러워”했던 산모를 끝까지 사랑으로 수술하고 치료했던 사건들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커틀러의 인내심과 그리고 끈질긴 사랑이 보여지는 대목이다. 그녀는 예수의 사랑 없이 치료하지 않았으며, 늘 그 사랑을 전달하고자 했다.
진료소에나 치료의 과정 가운데서만 그 사랑이 나타났던 것은 아니다. 설날에 간호원들과 함께, 진료소 대기실을 식당으로 바꾸고, “교회에 있는 부인과 어린이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20명을 초대하여 저녁을 함께 먹었”고, “초대된 모든 손님들은 쌀이 가득 담긴 그릇을 선물”로 받아갔으며, “이러한 행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그들 모두는 결국 변화되었다.” 이처럼, 그녀의 사역의 꽃을 피웠다고 볼 수 있는 “보구여관의 모든 활동의 기본”은 “선교”였고, “의료활동과 교육활동”도 결국은 “선교를 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했다. 진료실의 안이나 밖이나, 다방면에서 나타난 약자들의 필요를 채우며 늘 예수의 사랑을 전한 커틀러는 진정한 선교사였다. 커틀러가 보구여관의 사역에 있어서 늘 안타까워했던 부분은 바로 의료교육이었다. 그녀는 “병원의 바쁜 일정으로 의료 보조인들에게 간호 교육을 규칙적으로 시키지 못하는 상황”을 아쉬워했고, “의료보조인들을 적절한 기관에서 정규적이고 체계적으로 훈련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이러한 마음은 본국의 선교회에 보구여관의 필요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커틀러는 한때, “의사, 간호원 양성소 감독, 보구여관 전체의 관리자가 되어 3분야의 일을 관장”하면서, 더 많은 선교사들, 의료인들—특히, 간호원들—이 오기를 여성해외선교회에 요청했다. 자신 혼자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으며, 필요가 늘어나고 있는 선교지에서의 상황 속에서, 늘 더 많은 손길들이 필요하다는 점에 안타까워했고, 개선시키고자 노력했다. 개개인의 변화, 보구여관이라는 한 곳의 변화만을 집중했던 것이 아닌, 한 나라의 변화를 꿈꾸며, 더 많은 인원들을 요청했다고 볼 수 있다.
커틀러와 연관된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있었겠지만, 언급할 만한 에피소드는 아마 첫 한국인 졸업간호원으로 알려진 이그레이스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괴사병에 걸려 어릴 때부터 다리가 불구였던 이그레이스(원래 이름은 ‘복업’)는 보구여관에서 홀 의사가 집도한 수술로, 괴상당한 뼈를 제거했고, 이어 커틀러 의사의 지속적인 치료를 받아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고 걷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병원 조사로 간호 일과 환자들을 대상으로 전도했던 황메리 부인과 커틀러 의사에 의해 “기독교를 배워 1897년 정동제일교회에서 아펜젤러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세례명 ‘그레이스’를 받았”다는 에피소드는 수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준다. 하지만, 커틀러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커틀러의 치료와 복음전도를 통해, 한 사람이 육적으로 치료를 받았고 건강을 되찾았다. 그리고, 영적 회심과 함께 변화되었다. 이후, 간호원이 되었지만, 간호원 이상의 영향력을 끼친 이그레이스의 삶을 생각한다면, 커틀러로부터 시작된 복음의 영향력은 실로 너무나도 컸으며, 그녀의 선교사역에 다시금 집중해야 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커틀러의 보구여관에서의 사역은 깊은 사랑과 헌신으로 채워져 있다. 당시, 한국의 의료활동과 교육활동의 중심축에 속해있었던 보구여관을 20여년이나 이끌며, 늘 그 중심에 선교 즉, 예수의 사랑을 전하는데 있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녀는 분명 의사였지만, 선교사였고, 한 영혼 한 영혼을 목숨과도 귀중히 여겼던 예수의 제자였음에 분명했다.

3. 광혜여자병원에서의 사역(1912-1933)
커틀러는 1912년 3월 로제타 홀이 평양에 세운 광혜여자병원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홀과 함께 커틀러는 “부인병원, 어린이병동, 맹아학교 등을 설립하여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이 대목에서 커틀러가 얼마나 사회적 약자들을 향하여 그 마음과 노력을 쏟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예수의 사랑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연약한 자들을 찾아갔던 예수의 사랑을 커틀러의 사역의 방향성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그녀가 여기서 이룬 중요한 사업은 “병동신축”이었는데, 그녀가 늘어나는 환자들을 외면하지 않고자 했고, 늘 그 필요를 채워가려고 부단히 노력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커틀러의 사역은 광혜여자병원에서 머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의 의료사역에서의 가장 큰 특징은 “순회진료”였기 때문이다. 이 사역은 그녀가 선교의 원리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병원으로 찾아오는 환자들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지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찾아들어갔다는 점은 예수의 성육신의 원리를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1933년 은퇴할 때까지 버스나 앰뷸런스에 약품을 싣고 지방순회 진료활동”을 했다. 이 지방순회 진료활동을 “자동차 진료소”라고 불렀는데, “차 양 옆에는 ‘건강, 교육, 기독진료소’라는 글귀가 한글과 한자로 부착”했다. 여기서, 커틀러의 사역의 중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당시, 많은 필요가—육적필요, 지적필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영적필요까지— 보여 졌던 한국 땅에서, 의료와 교육, 그리고 선교—복음을 의료과 교육을 통해 전하는 것—를 통해 하나하나씩 채우고자 했던 그녀의 헌신과 섬김의 모습은 예수의 성육신과 사랑의 모습이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4. 한국 최초의 여성목사(1931)
1931년은 한국 감리교뿐만 아니라, 한국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여자 목사를 배출한 해이기도 하다. “1930년 남북 감리교회가 통합, 기독교조선 감리회 총회가 조직된 이듬해,” 1931년 동부, 중부, 서부의 “3부 연합연회가 개성 북부교회”에서 개최되었고, “연회 5일째 되던 6월 14일 오전”에 가장 중요한 행사, 바로 목사 안수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목사 안수 후보자들은 모두 여선교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중심에 있던 여성목사안수 후보자들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사람은 커틀러였다. 다른 후보자들보다 10여년 일찍 한국에 내한했고, 이미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한지 40여년이 지난 때이기도 했다.
커틀러는 일찍이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가 신학공부를 했고, 늘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감당고자 했다는 점은 그녀가 얼마나 철저하게 선교사로서 끊임없이 배우고자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결혼을 하지 않았던 그녀는 독신으로 철저하게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자 했다는 점을 또한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그녀가 미국의 기독교여자절제회 회원(Woman’s Christian Temperance Union)이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WCTU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개인적으로 절제운동을 소개하며 동조자를 모은 적”이 있었다. 즉, 그녀는 선교사로서 의료사업이나 교육사업에만 치중했던 것이 아니라, 절제운동을 통하여 한국인들의—특히, 여성들의—회심과 신앙의 성숙함을 이루고자 했다는 점, 즉, 목회자로서의 역할을 이미 감당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여성을 향한 진정한 여성목사였다는 점을 우리는 한국문화를 향한, 그녀의 견해를 통해서 또한 알 수 있다. 그녀는 당시 한국에서 흔히 이루어졌던 중매결혼을 불편하게 생각했고, “이곳의 결혼 풍습은 기독교의식을 접한 자들에게는 끔찍하게 보여진다”고까지 말했다. 자신의 “집”(home)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닌, 단순하게 “시어머니댁”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이해했던 한국의 결혼문화가 분명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커틀러와 여선교사들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분명 “기독교적 교제와 결혼의 형태가 그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는, 여선교사들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던 한국 사회에 발맞추어 문화적-사회적 문제점들을 실질적으로 하나 둘씩 다루고자 했으며, 그들의 목회자로서의 역량이 이미 여성들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었고, 그들의 목사안수는 다방면에서 실질적으로 적절했다고 볼 수 있다.

커틀러의 삶은 꽤나 단순했지만, 강렬했고, 한국 땅에서 끼친 영향을 실로 대단했다. 의사로써, 의료개혁자와 교육자로서, 복음 전도자로써의 역할을 통해 많은 이들이 예수의 사랑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기회였고 통로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녀는 은퇴 후, 귀국 전까지 한국에서 의료봉사와 선교활동을 지속했다는 점은, 한국을 향한 그녀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48년이라는 시간을 한국 땅에서 보낸, 그녀의 헌신을 한국교회는 기억해야할 것이며, 동일하게 세계 열방을 향한 복음의 열정을 예수의 사랑으로 실현해 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019-07-03 02: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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