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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Junckin, William McCleary(1865-1908, SP) / Junckin, Mary Leyburn(1865-1952, SP)
 작성자 : 박대현_양인모  2019-07-05 14:58:27   조회: 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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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기본사항
1. 이름 : 윌리엄 전킨(William McCleary Junkin, 한국 이름 전위렴[全緯廉])
2. 생몰연도 : 1965 ~ 1908
3. 소속 : 미국 남장로교회
4. 한국선교기간 : 1892년 11월 3일 ~ 1908년 1월 2일
5. 가족사항
부인 : Junkin, Mary Leyburn(1865-1952)
아들
1) Junkin, George Garnentt
2) Junkin, Sydney Morenland
3) Junkin, Francis Wood
6. 연표
1865년 12 월 13 일 미국 버지니아 크리스천 벅에서 출생
1887년 대학 재학 중 해외선교사로 헌신, 해외 선교를 위한 집회에 참석했다가 조선을 마음에 품게 됨
1892년 6월 부인 Junkin, Mary Leyburn(1865-1952)과 결혼
1892년 11월 3일 미국 남장로교회 최초 선교사 7인 중 부부선교사로 내한
1893년 9월 Tate 선교사와 전주 최초 방문
1894년 동학운동으로 서울로 철수
1895년 군산에서 전도 활동 재개, 선교사 공의회 회장 활동
1896년 2월 군산으로 이주
1896년 11월 자신의 집에서 교회 설립 터전 마련
1899년 12월 21일 영명학교 설립, 초대 교장이 됨
1901년 A. Damer Drew 선교사 귀국으로 익산, 옥구, 김제 등지로 선교구역 확대, 개복, 남정, 송지동, 대장리, 월성, 학천리교회 설립에 기여
1904년 선교본부에서 그를 전주로 이동 배치하고 20리 반경 안에서만 선교 활동을 하도록 제한, 서문교회 담임하여 예배당 신축, 인근에 6개 교회 설립, 포사이드 고아원 설립
1907년 12월 폐렴에 걸림
1908년 1월 2월 장티부스로 전주에서 사망


II. 선교사 소개 : 윌리엄 전킨(William McCleary Junkin, 한국 이름 전위렴[全緯廉])
1. 조선을 마음에 품은 대학생 윌리엄 전킨
1887년 해외 선교를 위한 집회에서 언더우드 선교사는 "조선의 충정도 지역과 호남 지역에는 단 하 사람의 선교사도 없습니다. 그 지방 사람들은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죽어가고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이 외침에 응답하여 조선을 마음에 품게 된 7명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후에 그들을 “7인의 선발대”라고 불렀는데, 윌리엄 맥클레이 전킨은 이 7인의 선발대의 멤버였다. 그는 대학생 시절부터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당시 가난하고, 개척되지 않는 조선에 선교사로 헌신하게 된다.

2. 7인의 선발대
1891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안식년을 맞이해 본국에 들어갔을 때 미국 각 지역을 순회하며 선교 상황 보고와 강연을 했는데, 1891년 9월 시카고 맥코믹 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에서 한국 선교에 관하여 강연을 하게 되었다. 이 때에 신학생 테이트(Lewis Boyd Tate, 崔義德)가 감동을 받았다. 또 1891년 10월에 테네시 주 내쉬빌(Nashiville)에서 개최된 전국 신학교 해외 선교연합회(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s) 주최의 집회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와 반더빌트(Vanderbilt) 대학교 유학생인 윤치호(尹致昊)를 강사로 초청해 한국 선교에 관한 강연을 듣고 한국의 현재 정세와 장래에 대해서 문답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벅찬 감격으로 강연을 들은 1. 맥코믹 신학교의 테이트와 2. 리치몬드의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학생 존슨(Cameron Johnson)·3. 레이널즈(William Davis Reynolds, 李訥瑞)·4. 전킨(William McCleary Junkin, 全緯廉) 등 네 사람은 한국 선교를 결심하게 되었다. 테이트는 지체하지 않고 미국 남장로교회 외지 선교부 실행위원회에 한국 선교사 지원서를 냈다. 다른 세 사람도 이어서 지원했다.
그러나 남장로교회 외지 선교부는 은자(隱者)의 나라(the Hermit Nation)로 알려진 한국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었고, 재정적인 이유와 그 지역 선교에 관심을 아직 두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선교사 청원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열정적인 그들은 물러서지 않고 더욱 결속해 한국 선교에 뜻을 같이하는 청년들(Miss Mattie S. Tate, Miss Linnie Davis. Mrs. Potsy Bolling)과 전킨의 신부 레이번(Mary Leyburn) 등이 동참·가세했다.
그들은 기도하며 선교 본부를 깨우치는 방도를 강구하기로 하고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미국 남장로교회의 지역인 버지니아 주, 북캐롤라이나 주, 테네시 주 등에 있는 주요 교회들을 순방해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해 줄 것을 부탁했는 데 언더우드는 쾌히 승낙하고 각 지역의 교회는 물론 각 신학교, 노회, 교계의 각종 집회 등에 나가서 한국의 형편을 설명하고 한국 선교의 긴급성을 역설했다.
그들의 열성은 더욱 높아져 교회 잡지에도 한국 선교에 관한 논문을 투고하며 1892년 2월에는 <선교(The Missionary)>라는 잡지에 “왜 우리는 한국에 가기를 원하는가?”라는 글을 실어 한국 선교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또한 그들은 ‘한국에 선교사로 나가게 될 것인가, 아닌가’의 중대한 일을 앞에 놓고 매일 오후 3시를 기도의 시간으로 정하고 기숙사의 방문을 닫고 마음을 같이해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께 구했다. 그들은 2년 안에는 기도의 응답을 받을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합심 기도한 지 불과 두 달 만에 그들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되었다.
뉴욕에 있는 언더우드의 형으로서 사업가이고,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 위원인 언더우드(John T. Underwood) 장로가 해외 선교 자금이 부족해 고민 중인 남장로교회 선교부에 3천 달러를 보내온 것이었다. 여기에 선교사 언더우드 자신도 5백 달러를 보태어 보냄으로써 남장교로회 선교부는 용기를 얻고 때마침 그리스 선교 방침을 중단하게 됨으로써 한국 선교 사업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래서 기도하고 있는 그들에게 ‘8월에 떠날 준비를 하라’는 승낙 전보를 보내게 된 것이다. 언더우드 형제는 북장로교회인이었음에도 남장로교회의 한국 선교를 위해 교단을 초월해, 자진해서 도왔다. 그래서 초대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은 언더우드를 ‘남장로교회 한국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부에서는 테이트, 레이널즈, 전킨 등 3명의 남선교사와 이미 동참하기로 결심하고 지원을 한 매티, 볼링, 레이번, 데이비스 등 4명의 여선교사 등, 모두 7명의 선교사를 초대 한국 선교사로 파송하여 이들을 ‘7인의 선발대(Seven Pioneers)’라고 일컫게 되었다.

3. 영명학교
1899년 군산에서 영명학교를 설립했다. ‘영명’이란 덕과 학업을 쌓아 온 누리를 밝게 비추라는 뜻이다. 이 영명학교는 현재 군산제일고등학교가 되었다. 1903년 2월 윌리엄 전킨 선교사는 한민족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며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중등교육과정의 영명학교를 지금의 군산시 구암동 언덕기슭에 개교했다. 본래 궁멀(구암동)에 미국인 선교사 전킨목사의 사랑방에서 여러명의 소년들을 모아 교육사업을 한 것이 이 학교의 출발점이다. 이들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사상과 민주주의 사상 등 신학문 보급통로 역할을 한 영명학교는 한강이남 최초로 3.1운동의 불을 지핀 자랑스런 역사를 지녔다.
군산의 3.5독립만세운동은 본래 군산 장날인 3월6일로 계획됐다. 영명학교출신으로 연희전문학교 의학부 학생인 김병수가 모교에 와서 자신의 은사 박연세선생 등에게 독립선언서를 전하면서 급박하게 돌아갔다. 이들은 독립선언서 등을 전달받아 군산에서 거사계획을 수립했으나 이를 눈치챈 일경의 급습을 받고 연행되면서 3.5만세운동이 무산될 지경에 놓였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이 학교 김윤실교사와 학생 등은 곧바로 거사를 하루 앞당겨 3월5일 교사와 학생들의 석방과 민족자주를 외치며 영명학교에서 출발, 인근 설애장터를 거쳐 군산경찰서까지 진출한뒤 일본 헌병대와 정면충돌했다. 이때 시위주동자들중 90여명이 검거되는 상황을 맞는다. 이 사건이 한강 이남지역 최초의 3.1운동이다.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적극 나서 도내 민족운동을 주도했고 일제로부터 온갖 탄압을 받고 폐교될 때까지 민족운동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다해왔다.
한편 초기 영명학교는 4년제 고등과와 2년제 특별과를 병설, 1911년과 1913년 각각 첫 졸업생이 나왔으나 1919년 3.1운동의 영향으로 특별과는 폐교됐다. 이 학교는 다시 1921년 보통과로 개편됐다가 1940년 10월 신사참배를 거부, 곧바로 폐교되는 상황을 맞아야 했다. 이 같은 자랑스런 독립운동에 앞장선 영명학교는 지난 70년대 후반 교명을 바꿀 때까지 긴 휴면상태에 빠져든다.

3. 한국 최초로 복음선 타고 복음 전하다
전킨은 전북 군산 구암동산의 선교베이스(1899년)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다. 군산선창지역에서 구암동산으로 선교부를 정한 것은 ‘복음선’을 정박하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전킨은 한국선교역사상 처음으로 ‘복음선’을 마련하여 복음을 전한 선교사이다. 그의 복음선은 한국지형에 알맞은 황토돛배였다. 그는 조선이라는 땅 끝으로 와 섬으로, 오지로 들어간 것이다.
금강을 따라 부여, 서천, 보령, 장항까지 복음을 전했고, 만경강, 동진강을 따라 옥구, 익산, 김제, 부안까지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고군산도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했다. 고군산도는 무녀도, 신지도, 선유도, 대장도, 관리도 등으로 이루어진 무리 섬(군도)이다. 전킨이 세운 교회는 만경강과 동진강 주변에 있는데, 배를 타고 가서 다시 말을 타고 복음을 전했다. 군산에서는 군산교회, 구암교회, 개복동 교회, 만경강 중심으로 만자산교회(옥구 지경리), 남차문교회(익산남전), 송지동교회(김제), 동진강 중심으로 봉월교회(김제)가 있다. 봉월교회를 통해 대창교회(김제)가 설립되었으며, 대창교회의 최학삼 장로는 선유도의 선유교회를 세웠다. 전킨선교사는 대창교회의 임시당회장이 되어 1907년 최학삼을 장로로 선출한다. 전킨이 뿌린 섬선교의 씨앗은 최학삼 장로를 통해 고군산도의 선유도에 선유교회로 피우게 하셨다.

4. 한국 축구와 야구의 아버지
전킨은 한국 축구의 아버지다. 평양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축구를 보급했다. 당시 평양에서 축구는 수천 명의 관객이 열광적으로 응원하는 인기 종목이다. 특히 숭실전문학교와 평양 신학교 학생 간의 축구 라이벌전이 화제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또한 군산의 영명학교에 야구부를 멜본딘학교에 정구부를 신설한 것이 1902년 무렵이었다. 오늘날 군산에서 뛰어난 야구선수들이 많이 배출된 것이 이유 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미 1894년부터 군산 개항 시기에 맞춰 이곳에 자리를 잡고 교회와 학교를 통해 씨를 뿌린 전킨 선교사의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5. 조선에 복음을 전하는 것에 목숨을 건 선교사
복음을 전하다 과로로 병에 걸린 전킨 선교사에게 남장로교회 선교본부는 “6마일 이상을 넘어가지 마시오! 전킨 선교사!”라고 명령을 내렸다. 미국 남장로교회 호남선교부는 윌리엄 전킨 선교사(Junkin, William McCleary, 1865~1908)에게 미국으로 건너와 요양할 것을 권했지만 미국으로 가면 더 이상, 조선으로 올 수 없다는 것을 안 그는 사양했다.
군산 구암에 선교부를 설치하고 금강, 동진강, 만경강 일대를 복음선을 타고, 말을 타며 복음을 전한 전킨 선교사가 그 명령을 지킬 리 만무했다. 오히려 전주 일대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전주서문교회를 서문 밖으로 이전 건축하였다. 그때 당시 전주 서문 앞거리에는 일본인들의 가옥이 하나 둘 들어서고 있었고, 이것이 전주지역 조선인들에게 위화감을 주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전킨은 교회를 세운 것이다. 일본인에게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들에게 있어 이것은 새로운 나라였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고백하며 찬양했을 조선인들의 찬양과 기도가 서문의 일본가옥들 거주지역에 전파되었을 때 그들은 이미 독립된 나라를 가졌던 것이다. 전킨이 폐렴에 걸린 것은 1907년 크리스마스 이튿날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심하게 앓았으며, 3명의 의사와 훈련된 한 간호사가 병의 진행을 막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헛수고였다.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한 전킨은 차분히 자신의 사역 방향을 제시하고, 둘러 있는 한국인들에게 몇 마디를 남기고는 사랑하는 이들과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그는 옆에 앉은 사람에게 “제가 만약 여기서 죽는다면, 죽는 것은 값진 것입니다”라고 말한 후 숨을 몰아쉬며 “나는 지금 갑니다. 그리고 나는 매우 행복합니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죽음이란 승리로 뒤덮이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와 조용히 연합된 그의 육신은 군산 선교부 묘지에……안장되었다. 회색 화강암의 비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여기 전킨 목사는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을 소유했노라.” 16년 동안 그와 동고동락했던 동료 선교사 레이놀즈가 “드문 인격의 소유자”라고 예찬을 아끼지 않았던 전킨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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