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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Pak, Esther(1877-1911, M)
 작성자 : 박요한1  2019-11-25 18:41:01   조회: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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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 / B080 / Pak, Esther (1877-1911)


<기말보고서> 박에스더 선교사 / Pak, Esther (1877-1911)

2017210290 3-5 박요한

Ⅰ. 기본사항
1. 이름 : Pak, Esther (김점동(金點童) -> 김에스더 -> 박에스더 / 한국 / M)
2. 생몰 연도 : 1877.3.16.~1911.4.13.
3. 출신 및 소속 : 한국, M(미감리교)
4. 한국 선교 기간 : 1900. 11.20(미국에서 귀국) ~ 1911.4.13.
5. 연표
1877.3.16. 서울에서 광산김씨 김홍택의 3녀로 출생
1886.11. 스크랜턴 대부인이 설립한 이화학당 입학
1891.1.25. 올 링거(F.Ohlinger) 목사로부터 에스더라고 세례를 받음
1893.5.24. 윌리엄 홀(William James Hall, 1860-1895)의 중매로 박여선과 결혼
1894.12.16.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 선교사와 함께 미국행
1896.10.1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최연소 학생으로 입학
1900.5 남편 박여선 폐결핵으로 사망
1900.11.20 귀국 후 로제타 홀 선교사와 의료활동 시작
1901. 보구여관의 의료선교사로 임명
1903 기홀(紀忽) 병원 부임
1908. 10. 22. 광혜여원(廣惠女院)에서 정규 의료 업무 수행
1909.4.28. 경희궁에서 열린 ‘초대 여자 외국 유학생 환영회’에서 그 공로를 인정받아 고종 태황제에게 은장(銀章)을 수여 받음
1910. 4. 13. 소천

6. 가족 사항
김홍택(부), 연안이씨(모)
이름과 생년을 알 수 없는 장녀
김마리아(2녀, 1873-1921, 정신 여학교 초대 교사)
김배세(4녀, 1886-1944, 세브란스병원 안에 창설된 간호원 양성소 1회 졸업생)
이름과 생년을 알 수 없는 양자(박에스더의 아버지는 4녀가 태어나자 양자를 들였다.
박여선(박유산, 남편, 1868-1900, 아내의 사회적 활동이나 학문을 위하여 자신의 희생을 기꺼이 감수한 인물. 미국 유학 때 박에스더가 공부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셔우드가(家) 농장과 볼티모어 식당에서 일함. 아내의 졸업 시험을 21일 앞두고 폐결핵으로 사망

Ⅱ. 선교사 소개 : 박에스더 선교사 / Pak, Esther (1877-1911)

1. 이화학당 입학과 회심 사건
김점동은 1877년 3월 16일 서울에서 광산김씨 김홍택의 4녀로 출생했다. 당시, 김점동의 아버지 김홍택은 아펜젤러에 고용되어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의 활동을 돕고 있었는데 이런 인연으로 1886년 11월 그녀의 나이 10세에 이화학당에 입학하게 되었다. 박에스더는 한국어로 성경과 교리문답을 공부하면서 복음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1888년 어느 날 밤 박에스더는 요란한 빗소리 속에서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는 극적인 회심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 경험은 로제타 셔우드 선교사가 남긴 기록 등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장마로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밤, 그녀는 자신의 방에 누워 빗소리를 들으면서 노아의 방주 때와 같이 인간들의 죄를 홍수로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두려움 속에 죄를 자백하며 구원을 비는 기도를 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두려움과 불신이 사라지고 마음속에 확신과 평안으로 가득하게 되는 신앙체험을 하게 되었다. 신앙체험을 한 후에 김점동은 이튿날 다른 친구들과 기도 모임을 하기 시작했다. 이 기도 모임에 점차 많은 학생이 참여하게 되었고 선생님들까지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 기도 모임은 한국 최초의 여성 기도회 모임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1891년 1월 25일 올링거 목사로부터 에스더라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김점동은 김에스더라고 불리게 되었다.

2. 결혼과 윌리엄 홀 선교사 부부
김에스더는 1890년 말부터 최초의 여성병원인 보구여관의 2대 책임자인 로제타 홀 선교사의 의료 사역을 돕고 있었다. 로제타 홀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은 그녀의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진료소에 통역을 제법 잘하는 점동이라는 학생 하나와 둘이서 일한다. 점동이는 영어를 잘하는 열네 살의 건강한 소녀인데, 영리하고 재빨라서 나는 그 아이를 꼭 훈련시키고 싶다.” - 1890년 10월 24일 로제타의 일기

로제타 홀 선교사의 의료 사역을 도우며 그녀는 조선 여성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꿈을 갖게 된다.
한편, 로제타 홀 선교사의 남편인 윌리엄 홀 선교사의 조수로 일하며 기독교로 개종한 박여선이란 청년이 있었다. 김에스더는 홀 선교사 부부의 중매를 통해 당시 조선의 관습으로써는 늦은 나이인 16세에 박여선과 결혼하게 된다. 사실, 박여선의 신분이 낮아 결혼의 장애가 되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 하겠다는 그녀의 결심으로 말미암아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김에스더는 남편의 성을 따르는 서양의 풍속을 따라 남편인 박여선의 성을 따서 박에스더라고 불리게 되었다. 박에스더의 남편인 박여선은 아내를 위한 헌신적인 삶을 산 인물로 평가받는다.
결혼 후에도 박 에스더는 계속해서 홀 선교사 부부를 도와 병원과 진료소에서 봉사 하였다. 특히, 1894년 5월 에스더 부부는 윌리엄 홀 선교사 부부의 선교 활동에 보조로 참여하여 평양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평양은 반 기독교 풍토로 가득한 곳이었기에 선교 활동을 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홀 선교사 부부가 박 에스더에게 선교 활동에 동참할 수 있는지를 물었을 때 박 에스더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하나님이 저를 위해 문을 열어주시는 어느 곳이든지 저는 가겠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평양의 문을 열어주시면, 저는 가겠습니다. 저는 몸과 영혼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제 몸과 제 마음과 제 영혼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고, 비록 사람들이 저를 죽일지라도, 하나님에 대해, 조선 사람들에게 가르치는데, 제 삶을 바치겠습니다. 저는 그 어떤 것보다, 예수님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박 에스더는 이미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동포들에게 전하는데 헌신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 말기의 혼란 속에서 민중 구호사업에 힘쓰던, 윌리엄 홀 선교사가 발진티푸스에 걸려 사망하게 되었다. 그러자 로제타 홀 선교사는 미국으로 잠깐 귀국하기로 결심한다. 이때, 박 에스더는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로제타 홀 선교사에게 부탁한다. 결국, 미 감리교 여성 해외 선교부의 허락과 경제적 지원을 받아 박 에스더 부부는 그녀와 함께 미국에 갈 수 있게 된다.

3. 미국 유학 생활
1894년 12월 박 에스더 미국에 도착했다. 그러나 의사가 되어 조선 여성들을 돕겠다는 그녀의 꿈을 이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머나먼 미국 땅에서 조산으로 아이를 잃었고 그녀가 공부하기를 꿈꾸던 펜실베니아 여자 의과 대학에 입학에 실패했다. 이런 슬프고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로제타 홀이 그녀에게 조선으로의 귀국을 권하자 박 에스더는 이렇게 답했다.

“만약 제가 지금 이것을 포기한다면, 또 다른 기회가 저에게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것을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남편도 그 어떤 것보다 제가 의사가 되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고, 최선을 다한 후에도 배울 수가 없다면, 그 때 포기하겠습니다. 그 이전에는 절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런 열정으로 박 에스더는 1896년 10월 1일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꿈을 이루게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당시 박에스더가 공부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셔우드가 농장과 볼티모어 식당에서 일하며 박에스더의 공부를 헌신적으로 돕던 남편 박여선이 폐결핵에 걸리고 말았다. 그래서 박에스더는 의학 공부를 하는 동시에 남편의 병원비도 벌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런 힘든 상황 속에서도 그녀는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런 그녀의 노력을 본 볼티모어 지부 통신담당자인 스티븐스 부인은 그녀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에스더는 이제 졸업까지 1년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학위를 받자마자 조선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녀는 성적도 만족할 만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본이 되는 존경받는 학생이면서, 우리의 한국 선교에 큰일을 감당할 인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폐결핵으로 고통받던 박여선은 박 에스더의 졸업 시험을 얼마 앞두지 않고 사망하게 된다. 슬픔 속에서 그녀는 졸업 시험을 훌륭한 성적으로 통과하고 1900년 조선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된다.

4. 선교사 박 에스더
박에스더의 노력을 높이 샀던 이들에 의하여 의대 졸업 후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조선 여성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그 꿈을 실천하기 위해 미감리회 여성 해외 선교부 파송 의료선교사로 1900년 11월 귀국한다.
당시, 조선에는 그녀를 데리고 미국으로 왔던 로제타 홀 선교사가 조선으로 돌아와 활동하고 있었고 이제는 그녀의 보조가 아니라 동료로 의료 선교를 하게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귀국한 직후 로제타 홀 선교사와 평양에서 10개월 동안 2414건을 치료했으며, 보구여관에서 의사로 근무한 1901년부터 1903년 초까지 매년 3000건이 넘었다. 또한, 평양 여성병원인 광혜여원(廣惠女院)에서 활동한 첫해인 1903년 말까지 4857건, 1904년에는 8638건을 치료했다. 이처럼 그녀는 조선 여성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그 꿈을 실천하는데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박에스더는 조선 여성들의 의료 교육에도 이바지했다. 당시 조선에는 미신적 치료방법이 만연했는데 치료를 받기 위해 의원을 만나기가 힘들었던 여성들은 그러한 치료방법 때문에, 오히려 병의 증세가 나빠지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았다. 그것을 계몽하는 데 큰 노력을 했고 간호원 양성소의 조직에 도움을 주었다.
박 에스더는 의료활동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1903년부터 지방 순회 선교 활동을 시작했는데 황해도의 700리가 그녀의 책임 지역이었다. 그녀는 이 지역을 순회하며, 여성과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또한, 1903년부터 1909년까지 평양에서 열린 여자 성경학교를 통해, 말씀과 위생학 강의함으로 많은 전도부인을 양성할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복음 전파와 미신적 치료방법의 계몽을 동시에 해낼 수 있었다.

5. 투병 생활과 죽음
몸을 아끼지 않는 열정으로 의료활동과 순회 전도 그리고 성경학교 강의를 해내던 박 에스더는 1905년 결국 건강을 잃기 시작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녀의 헌신적인 의료활동을 높이 사 그녀를 ‘우리들의 의사’라고 칭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중국으로 휴양을 떠나야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러던 중 1909년 4월 28일 폐결핵으로 투병 중이던 박에스더에게 기념 메달이 수여되었다. 당시,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헌신적인 활동을 통해 사회발전에 공을 세우고 있는 여성들의 업적을 찬양하고 격려하는 의미에서 ‘초대 여자 외국 유학생 환영회’를 베풀었고 그곳에서 표창을 받게 된 것이다. 박 에스더는 이를 매우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병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고 결국, 둘째 언니 신 마리아 집에서 병상 생활을 해오다가 1910년 4월 13일 소천하였다. 당시 많은 이들이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였고 추도회가 5월 27일 오후 8시에 청년회관에서 열려 그녀의 업적을 되새 기는 자리를 갖기도 하였다.
2019-11-25 18:4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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