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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36/Henderson Lloyd Putnam
 작성자 : 양승희  2020-07-07 13:32:46   조회: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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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더슨 선교사 / Henderson, Lloyd Putnam(1895-1932)

Ⅰ. 기본사항
⋅이름 : Henderson, Lloyd Putnam 한국명: 현대선(玄大善)혹은 한태선(韩太善)

1. 생몰연도: 1895. 8. 8 –1932. 10. 16
2. 출신 및 소속: 미국 / 북장로교, 정통장로
3. 한국선교기간: 1920. 10.30 – 1932. 10. 16
4. 연표
⋅1920. 10. 30 북장로교 선교사로 부인(Helen McQuilkin)과 함께 내한.
⋅1921. 10 만주 흥경에 파송 쿡(W. T. Cook)과 하르빈, 러시나 국경에 이르는 북만지역을 순회하며 교회 돌봄. 사경회 인도, 한인촌 순회하며 전도와 망국한 위로.
⋅1930. 만보산사건으로 만주 전역의 상황이 불안한 상태.
⋅1932. 10. 16 순회여행 도중 총살당함(일본군은 마적의 소행이라고 했으나, 일본군의 의도적인 살해 의견이 지배적).
⋅1932. 10. 24 선천에서 장례식. 부인은 대구에서 계속 활동하다 체임니스(O. V. Chamness)와 재혼 후 선교사적 사임하고 귀국.
5. 가족사항:
⋅아버지 Charles W Henderson
⋅어머니 Jean Hayes Henderson
⋅형 Harold H Henderson
⋅아내 Henderson, Helen McQuikin(부인)과 2남 1녀

Ⅱ. 선교사 소개
1895-1932.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수난자, 한국명 현태선 혹은 한태선. 1895년 8월8일 미국 오레곤주에서 출생. 1916년 워싱턴대학을 졸업하였고, 1919년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하였다. 뉴저지주 엘머에서 1년간 목회한 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임명받아 1920년 10월 30일 부인(Helen McQuilkin)과 함께 내한하였다. 선교부는 그를 만주 흥경에 파송하였는데 당시 몇몇 선교사들은 20대 젊은 사람을 그처럼 멀리 떨어진 위험한 곳에 보내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했으나, 1921년 2월 헨더슨 자신이 만주에 가서 약 한 달간 머물면서 돌아보고는 기꺼이 그곳에 갈 결심을 하였다.
이에 그는 부인과 함께 1921년 10월 흥경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미 그곳에는 솔타우(T.S.Soltau)가 1914년부터 주재하며 선교부를 개척하고 1921년 청주로 옮겨갔으며, 1919년부터는 쿡(W.T. Cook; 국유치)이 선교부를 관장하고 있었다. 이에 헨더슨은 쿡과 함께 흥경을 근거로 하여 하르빈과 러시아 국경에 이르는 광범위한 북만지역을 순회하며 교회를 돌보기 시작했다.
각지의 사경회를 인도하고 한인촌들을 순회하며 전도와 아울러 한인들의 망국한을 위로하였다.
1930년 만보산사건을 조작하여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만주국이란 괴뢰정부를 내세워 반일 세력을 제거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는데 민족주의 한국인들이 주로 그 대상이었다. 따라서 만주 전역의 사회상황은 극도로 불안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헨더슨은 자기의 책임을 유기하지 않고 자신이 맡은 광활한 구역을 계속 순회하며 전도하였다.
1932년 9월 인단 쿡과 함께 순회를 마치고 흥경으로 돌아온 그는 이내 또 다른 순회여행을 시작하려 하였다. 주변에서는 사태가 위험하니 기다리자고 하였으나 그는 “위험한 것은 사실이나 내 일터는 한국인 그리스도인들 안에 있다.”고 하며 한국인 요리사와 조사 몇 명을 데리고 흥경을 떠났다. 이들은 도중에 호위를 자청하고 나선 일본 군인들과 함께 마도령을 넘던 중 중국인 마적들이 출몰하여 총격전을 벌였는데 마적이 물려간 후 헨더슨은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절명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1932년 10월 16일 새벽 1시경이었다. 일본 측은 마적의 소행이라고 발표하였으나 그의 머리를 관통한 총알이 일본군인의 것이라든가 함께 동행했던 일행이 일본군인들에게 사흘 동안이나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것이나 헨더슨의 시체를 화장해 버린 것 등으로 미루어 이는 한국인을 지원하는 헨더슨 선교사를 의도적으로 살해하기 위해 일제가 조작한 암살사건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가 죽었을 대 품안에서는 성조기가 발견되었고 화장하고 남은 재는 봉천주재 미국영사관에 전달되었으며 이를 다시 대구에 있던 그의 형(H. H. Henderson)이 인수해 1932년 10월 24일 선천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선천에는 1932년에 죽은 그의 아들(Bruce)의 묘가 있었다.
부인은 그 후에 계속 한국에 남아 대구에서 확약하다가 1935년 같은 북장로회 선교사 체임니스(O.V. Chamness)와 재혼한 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돌아갔으며 헨더슨과의 사이에 낳은 2남 1년 중 살아남은 아들(Lawrence)이 6·25사변 때 한국에 나와 3년간 복무하다가 돌아갔다.

Ⅲ. 활동내역
1922년 8월 21일 남만노회 제6회가 홍경현 동풍예당에서 회집하니 회원은 선교사 2인, 목사 5인, 장로 16인이더라. 신임원은 회장은 국유치(쿡, Welling Thomas Cook), 서기 한경희, 회계 이지은이더라. 조사의 피임자는 지산온, 장형도, 김광현, 임군석, 정낙영 제군이더라. 목사 이동은 왕책문지방에 이지은, 화전자지방에 김윤석, 영외지방에 최봉석, 대확에 장관선, 길림에 송경오 등이 임시로 시무하다. 장로의 직을 신임한 자는 다황구에 박성집, 다스탄에 김윤세, 삼원포에 김선두, 화전자에 이창형, 방화촛에 박창식, 흥경성내에 차두호더라. 신학생 취교자는 오능조, 김광현, 임군석, 장형도, 김창식 지군이더라.
성경학교부에서 학생 40여명을 교사 5인이 1삭간 교수에 성적이 양호함을 보고하다. 전도사업이 점점 향상하여 김창식을 흥경지방에, 박정업을 길림현에, 조옥현을 동풍지방에 파송하다. 선천군 신성학교내 남만학우회에 금 15원을 기부하다.
선교사 쿡(국유치, Welling Thomas Cook), 헨더슨(현대선, Lloyd P Henderson) 2인이 여전히 시무하니라.

Ⅳ. 배경연구
헨더슨 선교사가 중국의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선교할 당시의 한국의 만주선교의 초기 배경과 만보산사건을 통해 당시의 한국인들의 만주내의 상황을 간단하게 살펴봄으로 당시의 선교의 여건과 한중 사이의 관계 등을 정치적 상황을 살펴보았다.

1. 한국교회의 초기 만주선교
한국 장로교회는 1907년 9월 17일에 제1회 독노회(獨老會)를 조직하면서 제주(濟州)에 이기풍(李基豊)을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그 5년 후, 1912년 9월 1일 제1회 총회(總會)가 설립될 때에 중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고, 1913년, 산동성 내양현지역에 박태로(朴泰魯), 사병순(史秉淳), 김영훈(金永勳)을 중국 산동(山東)으로 파송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는 러시아 해삼위(海參威)와 일본 동경(東京)과 만주(滿洲)에도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그 시작부터 선교적 교회였다.
한국교회의 초기 만주 선교는 두 계통으로 보게 된다. 하나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관할구역인 평북지방을 중심으로 한 남만주지역(압록강 이북지역) 선교이고, 또 하나는 캐나다 선교부 관할구역인 함북지방을 근거로 한 동만주지역(두만강 이북지역) 선교이다. 동만주(東滿洲)라고 하면, 두만강 이북지역인 간도(間島) 지방을 위시하여 시베리아 국경 동북 만주지역까지의 광범위한 지역이다. 이런 간도 지방에 대한한국 장로교회의 만주선교는 곧 서간도(西間島) 지역과 북간도(北間島) 지역 선교로 나눌 수 있다. 만주지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사역할 기독교 사역자의 요청은 1901년으로부터 시작된다. 평안북도에 있는 교회들의 선교회(the missionary society of the churches)에 의해서 한 사역자가 파송된 때부터이다. 그 다음 해[年]인, 1902년 가을에 위대모(魏大模, N. C. Whittemore)가 그곳을 방문하여 상당한 수의 신자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이후로 한국인 사역자와 외국 선교사들이 정기적으로 그곳을 방문하고 돌보기를 시작했다. 이미 만주에는 각각 약 70명의 교인들이 있는 교회가 둘이나 있었다. 그러나 1906년에는 나싯차이(Nasitchai)에 있는 교회는 중국 당국(the Chinese magistrate)에 의해 폐쇄가 되고 교인들은 교회에 모이거나 그들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서간도와 북간도 지역에 사는 한국인들은 본토 고국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립된 삶을 살고 있었으며 이들 중 많은 이들은 본국 고향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들도 있었다. 북간도는 더욱 심했다. 어느 한국인은 이 지역에 사는 우리 한국인들의 정체성이 절반은 러시아 사람이며, 절반은 중국 사람이고 그 나머지가 한국인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또 1910년부터 10여 년 동안에 많은 한국 사람들이 땅과 사람들도 익숙하지 않은 이곳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충분하지 못한 양식과 병으로 죽고, 단지 여자들뿐 아니라 젊은 사람들까지도 추위에 얼어 죽기도 하였다.
만주 선교는 서간도와 북간도 지역을 관할(管轄)하는 노회(老會)가 선교 사역을 담당하였다. 서간도 지역 교회와 북간도 지역 교회의 성장에 가장 큰 역할은 그 두 지역을 품고 있는 노회들이 감당했다. 서간도 지역은 후에 평북노회가 되는 북평안대리회(평북대리회)가 선교사를 후원하기로 하고 제4회 독노회(獨老會)에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선교사 파송 이후에도 평북노회와 평북노회 소속 교회가 서간도 지역으로 파송된 선교사를 후원하고 관리하였다. 이런 선교 사역은 1920년 남만노회(南滿老會)가 분립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2. 만보산사건
1931년 만주 길림성 소재 만보산 지역에서 한·중 농민 사이에 일어난 충돌 사건으로 사건 자체는 양국 농민들 사이의 국지적 충돌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 사건이 과장된 국내보도로 인하여 국내에서 한국인의 화교박해사선이 야기되었고 더욱이 사건이 대륙침략의 야욕을 품은 일제의 음모와 관련되어 있어 한·중 양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건의 발단은 일제와 결탁한 장춘에 장농도전공사라는 어영회사를 차린 중국인 학영덕이 만조산 삼성보에 있는 중국인 소유 미개간지를 조차하고 이것을 다시 한농 이승훈외 8명과 주차 계약하여 개간하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학영덕은 중국인과 조차한 계약을 중춘현 정부의 인준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불법으로 한국인과 재차 계약을 체결한 것부터가 문제였다.
이승훈 등 한국인측은 한국 농민 188명을 이 지역에 이주시키고 농지 개간을 시작했는데 불모지였으므로 수로공사를 먼저 해야 했고 수로 변경으로 피해를 입게 된 중국 농민들이 항의하며 한국 농민들의 공사를 방해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측의 농지 개간으로 실질적인 피해를 입게 된 면도 있지만 당시 일제의 중국침략 선봉대로 한국 농민을 오해하고 있던 중국 농민들은 민족적 인 감정에서 한국 농민 측을 방해한 것이다.
결정적인 충돌은 1931년 7월 2일 중국 주민 3,4백명이 공사현장에 난입하여 공사를 저지한 데서 일어났다. 일본 경찰이 충동하여 중국 농민 측에 발포함으로써 큰 피해는 없었으나 이 사건이 국내에 과장 보고됨에 따라 사건은 다른 국면으로 전개되었다.
이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자 국재 각 곳에서 중국인 화교를 박해하는 사건이 터졌는데 호외가 나온 그날 인천에서 화교습격사건이 일어난 이후 7월 10일을 고비로 전국에 확산되어 화교는 막대한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게 되었다(리튼[Lytton]은 사망 127명, 부상393명, 재산피해 250만원정도라고 보고하였다).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피신한 화교들에 의해 국내 화교습격사건이 중국에 알려지자 이번에는 중국에 있는 한국인들이 똑같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처럼 사태가 한·중 양국의 극단적인 보복사건으로 확대될 지경에 이르자 민족지도자와 종교·사회 단체가 진상을 파악하고 사태의 확산을 방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손정도 목사와 윤복영 등 민족지도자들은 길림의 사건 현장을 답사하고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 뒤 길림한교 만보사사건 토구위원회를 조직하고 배일선언서를 작성 배부하였으며 국내외에 진상을 알렸다. 또 사건의 발단이 된 김이삼을 소환하여 사죄성명서를 작성하였다. 봉천에 있던 백영엽목사외 여러 민족 지도자들과 함께 중국 현정부를 방문하고 사태를 설명한 뒤 만주에서의 한국인 박해를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공정성을 보인 동아일보 기자 서범석과 함께 봉천 교육회관에서 평양으로부터 피신해 온 화교들이 한국에서의 화교피습사건을 폭로하고 재만 한인들에 대한 보복을 주장할 즈음 중국인 유지담왕화·염보형 등을 찾아가 진상을 이야기하고 일본의 음모를 폭로하여 쌍방 충돌을 막을 수 있었다.
한편 국내에서도 동아일보·조선일보 등 민족계언론지의 정확한 사태구명 보도와 함께 종교·사회단체를 중심으로 화교탄압사태를 수습해 나갔다. 만보산사건은 기독교 민족지도자들과 언론의 재빠른 사태수습으로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고 이를 계기로 오히려 중국과 한국 내에 배일사상이 더욱 고취되었다.


Ⅴ. 사진 및 기타자료

<자료1> 헨더슨의 여권사진 / 1921년 만주 흥경이 선교의 목적지임을 알려준다.
<자료2> 신의주 바로 위가 흥경이다. 헨더슨이 이 지역에 정착하여 선교하였다.


<참고문헌>
【도서】
「내한 선교사 총람:1884-1984」, 김승태, 박혜진 엮음,(서울: 한국기독교교역사연구소, 1994)
「기독교대백과사전」제16권(수난사화),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편,(서울:기독교문사, 1983)
「기독교대백과사전」제5권,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편,(서울:기독교문사, 1983)
「조선 예수교 장노회사기 하」, 양전백 외 2명, 이교남 역,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7)
N. C. Whittemore, “The Call of Manchuria,” KMF 9 (December, 1913)
W. T. Cook, “Itinerating in Manchuria,”
C. R. Kearns, “Get out of Manchuria,” KMF 3 (January, 1907)

【논문】
한국교회의 초기 만주 선교,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연구원, 선교와 신학 제41집, 민경운
Lloyd P. Henderson, “A Visit to some Korean Churches in North Manchuria,” KMF 25 (March, 1929)
Harry A. Rhodes, “Manchuria Again,” KMF 11(March, 1915)
W. T. Cook, “Itinerating in Manchuria,” KMF 16 (November,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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