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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Chard, Robert(1879-1968, SA) / Chard, Margaret(미상, SA)
 작성자 : 이성현,이시영  2019-07-02 01:08:47   조회: 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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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드 선교사 / Robert Chard (1879-1968)

기본 사항
이름 : Chard, Robert / 채드 / 한국 이름 : 차우드(車宇逗)
가족 사항 : 부인 Chard, Margaret, 슬하에 두 자녀 이름 미상
생몰연도 : 1849-1968.12.31.
출신 및 소속 : 구세군 소속 서기 장관
한국 선교 기간 : 1927.06.24.-1929.04.13
연표 :
1879-1968: 구세군 사관, 영국에서 출생, “토텐함 군영”에서 신앙생활을 하였고 1899년 구세군 만국사관학교를 졸업, 참위에 임관 하였다. 그 후 영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구세군을 거쳐 중국 구세군에서 10년 동안 전장서기관으로 봉직했다.

1906: 마가레트 사관과 결혼하였고 중국 구세군 재임시절인 1920년 그의 처남이며 한국 선교사관 리처드 부령이 별세하자 한국을 방문, 그 장례식과 추도식을 인도하고 귀임
1927: 6월 24일 한국 구세군 서기장관으로 피임되어 가족과 함께 내한
1929: 4월 13일까지 복무하였다. 그동안 토프트 사령관이 신병으로 병석으로 누워 있다가 1928년 6월에 별세하였다. 사실상 서기장관인 ‘차드’가 사령관의 직무를 대행. 재임시 “순도대”라는 성경통독운동을 일으켰고 <구세군가>를 개정, 발행했으며 <결애단>이라는 단체를 통해 소년운동을 일으킴. 1년에 두 번씩 유년 결심주일을 두어 주일학교 학생들의 신앙결단을 촉구했고, 장년들을 위한 전장부의 정식 발족도 보았다. 육아사업을 위해서 공회당에서 동요와 무도회를 개최. 사령관이 부재한 과도기에 각국 출신 사관들을 단합, 통홍하여 한국 선교를 안정시키는데 크게 공헌
1929: 4월 13일 부인의 신병 등으로 한국을 떠났다. 그 후 만국본영, 아프리카 로데지아군국 사령관으로 활동하는 등 구령사업에 계속해서 매진함.
1968: 12월 31일 별세.

선교사 소개 : 채드(Chard, Robert, 1879-1968)

구세군 서기 장관 채드, 혼란의 시기에 한국에 오다.
채드 선교사는 1927-1929년 짧은 기간동안 한국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했고, 또 특정 사역이나 부서의 장 혹은 사령관으로 사역한 것 또한 아니다. 그러나 그가 한국에서 사역을 하던 시기는 구세군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시기이고, 또 그는 사령관 인사가 교체되던 과도기적인 시기에 한국에서 사역하며 사령관들을 도와 수많은 사역들을 감당한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채드 선교사의 사역을 이해하면 구세군 개척과 도전의 시기를 거쳐 본격적인 사회 봉사를 감당하던 시기로의 출발점을 이해할 수 있다. 채드 선교사 이해를 통해 한국 구세군 선교의 역사의 한 부분을 알아보도록 하자.

2. 26 분규 사건의 중심 김덕준과 서기 장관 도원의
채드 선교사의 사역을 알아보기 앞서 채드 선교사가 한국에 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다. 그것은 구세군 100년 역사 가운데 가장 안타까운 내부 분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1926년 구세군 사관 김덕준 분위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의 공적에 비해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비이성적인 요구와 모욕적인 언사들을 계속 행했다. 그에 따라 서기 장관 도원의와 면담을 했고 이어서 두영서(Toft) 사령관과도 면담을 한다. 두원서는 좋은 사람이 되어 구세군의 규칙을 지켜나가기를 요청했으나 김덕준은 이를 거부한다. 그를 더 이상 사관직에 두는 것이 불가능해져서 두영서 사령관을 그를 해임시킨다. 그러나 김덕준은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사무실을 떠나지 않겠다고 파업을 선언하고, 서기 장관 도원의는 조선인 사관들에게 김덕준이 돌아가기 전에는 자리를 떠나지 말라고 당부하고 오후 6시에 퇴근한다. 그러나 김덕준이 끝까지 퇴근하지 않음에 따라 도원의는 사령관과의 논의 하에 사무실에 돌아갔으나 모욕만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김덕준은 도원의에게 합당한 보수인 400원을 주면 사무실에서 나가겠다고 한다. 결국 도원의는 경찰을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구세군 내부에서 경찰을 불러 일을 해결하려는 방식에 대하여 내부 분규가 발생하게 된다.
이에 따라 서기 장관 도원의는 만국본영으로부터 전근 명령을 받게 된다. 그가 구세 신문 6월호의 고별사를 통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마지막으로 제군에게 충고하는 것은 하나님께 진실하여 구세군의 교리와 구세군주의에 굳게 서서 조선을 구원코자 힘쓰고 애쓰는 제군의 인도자들을 보좌하는데 제군의 충성과 믿음으로 사령관을 도와 나의 후미로 오는 정령보 차드 동부인을 열정으로 환영하길 바란다' 였다. 그는 서기 장관의 자리에서 분규 사건의 아픔을 겪고 결국 전근까지 가게 된 것이었다.
3. 서기 장관 도원의의 후임 채드
도원의 서기 장관이 전근을 감에 따라 서기 장관직이 공석이 되었고, 후임으로 차우도 정령부 동부인이 임명을 받고 조선의 땅을 밟게 된다. 그는 6월 25일 토요일 중국에서 출발하여 경성에 도착한다. 6월 30일 월요일에는 환영 다과회와 환영 집회를 열게 된다. 채드 선교사의 한국 선교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4. 조선 구세군 제5대 사령관 두영서(Toft) 휘하에서의 사역(1927.06.24-1928.06.15)
채드 선교사는 구세군의 서기 장관으로 사령관 휘하에 있던 인물이라 독자적인 사역을 해나갈 위치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역은 그의 사령관과 함께 한 동반 사역들이다. 먼저 채드 선교사가 두영서 사령관과 함께한 12개월동안 조선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 알아보자.

a. 모금 운동
a-1 극기 모금 운동 : 1927년 3월 15일~4월 말까지 극기모금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26 분규 사건의 여파로 구세군의 이미지가 실추되어 있었고, 또 사관들이 대거로 면직되고 사관 학생들이 모두 퇴출된 상태였기 때문에 모금이 원활하게 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도 구세군의 모든 이들은 최선을 다했다. 구세군이 26 사건으로 이미지가 크게 실추된 것을 감안한다면 이 극기 모금운동은 어느정도의 성과를 이룩했다고 볼 수 있다.
모금액 : 충청 688원 65전, 전라 840전 69전, 의성 242원 20전, 해주 1,138원 50전, 개성 426원 97전, 고산 709원 40전, 경성 2,816원 95전, 대구 922원, 영덕 500원 26전, 일본 2,049원 6전, 본영 339원 30전 총 합 : 11,294원 62전

1928년에도 극기 헌금 모금을 하였다. 4,5월 사관들의 보고에 의하면 전년도 극기 모금보다 진행이 훨씬 원활하고 빠르게 되었다. 1928년 4월 18일~5월 31일까지 계속 되었다. 사관들은 친절한 대우와 협조를 받았다. 극기 모금의 결과는 분규 사건 이후 사관들과 구세군이 차차 회복되가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모금액 : 13,450 95전

a-2 추수 감사절 모금 운동 : 극기 모금 운동이 전년도에 비해 위축된 것과 상반되게 추수 감사절 모금은 전년도보다 오히려 더 증가되었다. 경제적인 상황이 물론 좋은 것이 아니었지만, 모든 지역의 결과를 집계해본 결과 전년도보다 2,691원 50전이 증가된 액수가 모였다.
모금액 : 4,443원 21전

a-3 빈민 구호 운동 : 1927년 12월에는 빈민 구호 운동이 있엇다. 역시 26 분규 사건의 여파로 기금 모금 현황이 별로 좋지 않아 사업을 축소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후반기에 극적으로 성공적인 모금이 되어서 게속 구호를 할 수 있었다. 12월 23일에 경성 제2영문과 경성 제3영문에서 400포대의 쌀을 극빈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구세군에서 추운 겨울철 거처가 없는 사람들을 위한 쉼터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적합한 건물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고, 많은 어려움과 눈에 보이는 반대가 있었다.

b. 건축 사역
b-1 제물포 영문 회관 : 1927년 11월에 두영서 사령관을 필두로 서기 장관 채드, 전장서기관, 그리고 제물포의 일본인, 조선인 지역지도자들이 함께 제물포에 새로운 영문 회관을 공식적으로 봉헌하였다. 이 회관은 굉장히 훌륭한 건물이었고 필요한 사업을 하기에 적합한 건물이었다. 이 회관 개영으로 인해 제물포에서 구세군의 선교 기회가 확장되었다.

b-2 수많은 영문 회관들 : 제물포 영문 회관들 뿐만 아니라 대구 영문회관, 개성지역 곤동리 영문회관, 전라지역 독암리 영문회관, 오리동 영문회관, 영동지역 광평리 영문회관, 개성지역 남촌 영문회관, 영동지역 본영을 건립하였다.

c. 사관 학교 건립 : 1926년 26 사건으로 모든 생도들이 퇴출되는 아픔을 딛고 두영서, 채드를 비롯한 구세군 수뇌부는 사관 학교 건립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경성에 859평의 대지를 마련하였다. 이 사관학교 건립은 여러 해 소망해온 일이었다. 1928년 봄에 완공을 목표로 하였고, 적어도 50명의 사관 학생과 사관학교 교관을 수용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d. 문서 사역
d-1 번역 및 출판 :먼저 번역서 및 구세군 서적의 보급을 통해 구세군 교리와 방법에 대하여 더 바른 이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또한 번역회의에서 전장사관 군령군율, 성서 연구, 구세군 용어사전, 성결에 이르는 단계 등을 번역하였다. 이들의 작품 가운데 조선어 군가는 영문 선교사업에 매우 큰 성과를 거두는 찬송가였는데, 261장의 구세군 찬송이 실려 있으며, 비슷한 장의 후렴이 실려 있어 집회에 생명을 불어 넣곤 하였다.

d-2 잡지 : 1927년 1월에 최초의 조선어로 된 '사관'지가 발행되었다. 창간호와 더불어 2개월마다 발행된 사관지를 조선 사관들에게 보급하여 영적인 도움을 주었다. 또 매 페이지를 통해 꺠달음을 얻었다는 간증들이 들려왔으며 구세군 사관들의 질적 수준 향상에 도움을 주었다.
e. 양성과 교육 :
e-1 하사관회 : 두영서 사령관과 채드 서기장관은 전국을 순회하며 하사관회를 개최하였다. 특별히 채드 서기관은 2월 1일 해주에서, 2월 4일 개성에서, 2월 10일 홍성에서 개최된 하사관회를 직접 인도하였다. 여기서 구세군과 구세군의 원칙과 목적 그리고 직분에 대하여, 하사관으로서의 개인적인 책임에 대하여 강의하였고, 하사관들은 분명한 소명 의식과 영적 능력, 넓은 비전을 품고 돌아가게 되었다.

e-2 사관 양성 : 26 분규로 인한 사관학생 퇴교 조치 이후 1927년에 18기 사관학생들이 입교하였고, 1928년 6월 25일 경성 제1영에서 서기장관 채드의 인도로 임관을 받았다. 임관식에 앞서 학생들은 헌신 예배를 드렸다. 임관식 시기가 두영서 사령관의 승천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임관식은 더욱 엄숙하고 숙연하게 진행되었다.

5. 이도식 중령 승천
고아원 아이들을 사관학교에 데리고 와서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갈아 입혔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천연두를 묻혀 와서 온 사관학교에 퍼지게 되었다.
그때 이도식 중령이 임시 책임자로 사관학교에 있다가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때는 1920년 2월 5일이었다.
장례식은 당시 채드 서기 장관이 치루었는데 그때 부른 노래는 “Away form his home and the friends, we will die at our post” (고향과 친구를 멀리 떠나 우리는 전장에서 죽으리라)

6. 두영서 사령관의 승천(1928.06.15.)
26 사건으로 크게 힘들어 하던 두영서 사령관은 1928년 봄에 병세가 매우 위독해졌다. 4월에는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본영에서의 모든 직무에서 손을 놓아야 했고, 서기장관 채드는 그의 집으로 방문하여 중요 사안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두영서는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어 6월 15일에 결국 승천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6월 18일 경성 제1영에서 채드 서기 장관의 인도로 거행되었다. 6월 20일에 거행된 추도식에도 채드 장관이 참여하였고 수많은 이들이 두영서 사령관에게 조사를 하였다.

7. 조선 구세군 제 6대 사령관 박준서 휘하에서의 사역(1928.06월~1929.04.13.)

a. 추수 감사절 모금 운동 : 두영서 사령관의 시기에 그러했던 것처럼 박준서 사령관의 시기에도 추수 감사절 모금 운동은 계속 되었다. 1928년에는 가뭄과 홍수로 인해 상황이 매우 좋지 않났지만 전년도보다 오히려 약 500원이 더 모금되어 5045전 93전이 모금되었다.

b. 정동 사관학교 설립 : 1928년 09월에 1927년부터 진행된 사관학교 건립이 마무리 되었다. 이로 인해 사관 학생으로 55명이 교육과 훈련을 받게 되었다.

c. 자선 냄비 사업 : 1928년에 박준서 사령관과 그의 부하들은 한국 최초로 자선 냄비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1928년 12월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크리스마스 시즌을 중심으로 20개소에서 최초로 자선 냄비 사업을 진행하였다. 자선 냄비 모금액은 848원 67전이었다. 이 모금으로 급식소를 차려 매일 120~130명의 노숙자와 걸인들에게 밥을 주었다.

8. 아내 Margaret Chard의 건강 악화와 본국 귀환
조선에서 상당히 짧은 임기를 맡고 있던 때에 채드 서기 장관의 아내는 건강이 매우 심하게 악화되었다. 채드 서기 장관의 가족은 요양을 위해 조선 군국을 떠나야만 했다. 채드 장관은 조선에 도착한 시기 자체가 너무 혼란스러운 시기였고(26 사건으로 인하여) 또 약 5개월은 두영서 사령관의 건강 문제로 실질적으로 사령관의 직무까지 맡아야 했고, 곧이은 박준서 사령관의 취임은 새로운 스타일의 사령관에 적응해야 했다. 때문에 그는 임기 내내 본영에 매달려서 업무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조선에 방문하지 못한 곳이 상당히 많았지만 채드의 귀환 직전에도 박준서 사령관이 대장 선거 참석 차에 영국에 간 관계로 조선 방문 여행은 불가능했다. 경성에서 송별회만 진행하였는데, 마가렛 채드 부인은 어느 모임에도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못했다. 3월 21일에 채드 부부와 두 아들은 조선을 떠났다. 전국에서 동관들이 함께 채드 장관의 부인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였다. 이후 설보덕 참령이 채드 서기 장관의 후임으로 임명되며 채드의 한국 사역은 마무리된다.

채드 서기 장관은 사령관이었던 두영서와 박준서를 보좌하는 자리에 있었다. 실질적으로 모든 업무를 감당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또한 혼란스럽던 상황과 두영서 사령관의 건강 문제로 그가 맡아야 했던 업무들의 무게들은 상당히 과중하였다. 그러나 그는 모금 운동을 전혀 줄이지 않았고, 계속해서 모금 사업을 하여 조선의 빈민들을 실질적으로 돕고자 노력하였다. 더불어 박준서 사령관과 함께 한국 최초로 구세군 자선 냄비 사역일 시작하여 현재까지도 수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전달해 줄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한 것이다. 빈민들을 실제로 돕고, 학교 설립으로 후진들을 양성하고, 직접 각지를 돌아다니며 순회 집회를 하며 영적인 개안을 위해 노력하였다.
채드는 정말 조선에 이웃 사랑과 후진 양성을 위하여 조직적으로 도움을 준 인물이란 것이다. 구세군이라는 커다란 조직체의 업무에 매몰되지 않고, 오히려 큰 조직의 영향력을 활용하고, 이웃 사랑의 순수한 목적은 계속 유지한 그의 사역 때문에 아직까지도 한국에서 구세군 사역이 계속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 서적 :

김준철. 『한국 구세군 100년사: 1908-2008』. 서울: 구세군출판부, 2008.

장형일. 『85년의 발자취: 구세군 년대표』. 서울: 알라교육기금회, 1993.

장형일. 『구세여록: 구세 전선의 숨은 사실』. 서울: 세종문화사, 1982.

장형일. 『한국 구세군사』. 서울: 구세군출판부, 1975.

한영제. 『기독교대백과사전』. 서울: 기독교문사, 1970.

전택부. 『양화진 외인열전 “이 땅에 묻히리라”』. 서울: 弘盛社, 1986.

강돈구. 『구세군의 역사와 정체성』. 서울: 국내학술기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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