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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Fitch, George Ashmore(1883-1979, YMCA) / Kempton, Alberta Casterlin(1886-1919), Allen, Franc
 작성자 : 배용기,최광수  2019-07-02 10:53:42   조회: 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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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애시모어 피치/George Ashmore Fitch
(1883년 1월 23일 ~ 1979년 6월 3일)

I. 기본사항

1. 이름: George Ashmore Fitch / 조지 애시모어 피치 / 한자명: 費吾生
2. 생몰연도: 1883년 1월 23일 ~ 1979년 6월 3일
3. 출신 및 소속: 미국, 장로교
4. 학력: ◉미국 뉴욕 유니언 신학교 학사(1905년)
◉미국 우스터 칼리지 졸업(1906년)
◉미국 콜럼비아 신학대학원 신학과 신학석사(1906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문학석사(1908년)
◉미국 콜럼비아 연합신학대학원 목회학과 신학석사(1909년)
◉미국 콜럼비아 연합신학대학원 목회학과 신학박사(1921년)
5. 한국선교기간: 1909 – 1961 (중국에서 주로 활동함)
6. 연표
1883.1.23. 중국(당시 청나라) 장쑤 성 쑤저우에서 출생
1900. 미국으로 건너가서 학업함.
1909. 목사 안수 후 중국으로 돌아옴 , 상하이 YMCA 사무총장
1910. 부인 앨버타와 결혼.
1919. 미국 한인구제회, 상하이 한인학교 ‘인성학교’ 모금활동을 지원, 앨버타가 장티푸스 로 사망하여 사별.
1920. 한인구제회 이사를 역임.
1924 감리교 선교사로 상하이에 온 제랄딘과 재혼
1932. 윤봉길 의거로 인해 일본경찰에 쫓기던 김구, 엄항섭, 안공근, 김철을 자택에 숨겨 주었으며, 위치가 노출되자 중국인으로 위장시켜 상하이를 탈출시킴.
1936. 9 난징 YMCA 사무총장
1937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을 국제위원회를 조직하여 세계에 알림.
1941 미얀마로드 미군 수송활동에 참여,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중국 국민당의 연락사항을  미국 전략정보국(OSS)에 전달하는 첩보작전을 수행.
1941.4 하와이 주 호놀룰루에서 한인 협회를 개최
1942 중국 국민당 정부를 상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청원.
1944. 란저우 YMCA 사무총장
1947. 한국 YMCA 총간사로 임명되어 6.25전쟁 중 구호활동에 전념.
1951. 한국 YMCA 사무총장 사임
1952. 문화공로훈장
1958–1963. 대만의 탐강 대학교 물리학과의 고문으로 재직
1963. 캘리포니아 주 클레어몬트로 돌아와 96 세의 나이로 그의 집에서 사망.
1968. 건국훈장 독립장
1905.6.10. 귀국
2018. 국가보훈처 1월의 독립가로 선정

7. 가족사항아내: Alberta Casterlin Kempton,(1886-1919)/ Allen, Frances Ann(Fannie) Messenger (1859-1948)자녀: 메리 엘리엇/ 자넷 / 앨리스
부모: 부-George Field Fitch, 한자명 (費啓鴻)/ 모- Mary McLellan Fitch


II. 선교사 소개: 조지 애시모어 피치/George Ashmore Fitch(1883 ~ 1979)

1. 독립운동의 숨은 공로자

조지 에시모어 피치는 주 활동무대가 중국이었지만 한국 독립의 숨은 조력자였고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한 선교사였다.

1883년 1월 23일, 청나라 장쑤 성 쑤저우에서 장로교 선교사로 활동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운 '조지 필드 피치'의 아들로 출생한 그는 일찍이 형제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교육을 받은 후 1905년 뉴욕 유니언 신학교를 나오고 목사가 된 그는 1909년 청나라 장쑤 성 상하이로 돌아와 YMCA 간사로 활동한다.
애쉬모어는 상하이 YMCA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매주 수요일 저녁 성경공부 모임을 통해 쑨원(孫文), 탕사오이(唐紹儀), 왕충휘(王寵惠) 등 중국 국민당 정부인사 뿐 아니라 중국의 유명한 사업가 쑹자수(宋嘉樹), 니치지에(聶其杰), 모우추(穆藕初) 등과 교류하고 있었다. 이러한 피치 일가의 인적 네트워크는 한국인들이 중국 국민정부 인사들과 교류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피치 일가의 이러한 활동은 일제의 감시를 불러왔다.
1918년 주중 미국대사의 환영행사에 여운형을 초대하였고 '찰스 크레인' 주중 미국대사에게 여운형을 소개해 한국의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중재했다. 여운형이 초대장도 없이 환영파티에 참가하여 크레인을 대면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북경정부 외무부장인 왕정팅(王正廷)이 애쉬모어가 주재하는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9년에는 미국에서 설립된 한인구제회가 모금 활동에 어려움을 겪자 아버지와 함께 미국인 선교사들에게서 구호품과 의연금을 모집하였고 상하이에 설립된 한인학교인 '인성학교'가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하자 모금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1920년 한인구제회의 이사로 활동한다.

1923년 아버지 필드가 사망한 후인 6월 휴가를 얻어 미국으로 가면서 김마리아(金瑪利亞), 황기석, 손진실(孫眞實) 등과 함께 같은 배에 동승해 한국인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김마리아 등과의 동행은 아버지 필드가 한인들의 미국 유학을 도왔던 것처럼 한인들의 미국 유학을 돕기 위한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1932년 4월 상하이 홍커우 공원(虹口公園)에서 발생한 윤봉길 의거로 애쉬모어는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직접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홍커우 공원 투탄의거 직후 피신해 온 김구, 엄항섭, 안공근, 김철을 한 달 동안 자택에 숨겨주었다. 일본 제국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부인 '제랄딘'과 김구를 부부인양 위장시켜 상하이에서 탈출시킨다.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사건 여파로 진행된 일본 제국 영사관 경찰의 불심검문에 체포된 안창호의 소식을 듣고 프랑스 조계지에서 프랑스 언론사와 경찰서장에게 "일본 재국 경찰의 불법적인 한국인 체포와 탄압을 방조하는 것은 프랑스 혁명정신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질타하며 프랑스인들의 각성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1944년 그는 일본 제국과의 전쟁에서 한국광복군을 활용하면 미국에게 도움 될 것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해 한국광복군 제2지대와 OSS 부대의 합동작전이 가능하도록 도왔다.
애쉬모어는 미국무부에 임정의 인적구성과 이들이 종전 이후 한국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지에 대해 총 12개 항목으로 정리해 보고했다. 애쉬모어의 보고서는 1919년 임정 수립과 이후 모든 활동에 대한 내용을 포괄하고 있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에서 파악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시각까지 담겨있었다. 또한 광복군의 활동에 주목하여 이들을 활용하여 대일전에 나서면 미국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게다가 임정 내부 인사들의 정치적 성향까지 파악하여 보고했는데, 이러한 애쉬모어의 보고는 광복군 제2지대와의 OSS 합동작전과 미국의 전후 대한정책 수립과정 및 그 내용과 맥락을 같이했다.

이후 1945년 일본의 항복 사태가 도래한 이후 1947년 미군정 시대 YMCA 총간사로 임명돼 었다. 1947년 7월 7일 한국에 내방한 애쉬모어 부부는 대한민국정부수립에 앞서 대한적십자사의 정식 발족 준비와 한국 YMCA조직에 나섰다. 애쉬모어 부부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한국 각지에 YMCA조직과 함께 상하이에서 해왔던 것처럼 구호에도 앞장서다가 1949년 8월 8일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2. 그의 가족들

⓵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
독립운동사에서 ‘피치 목사’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으나 그 일가가 함께 활동했다는 내용은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었다. 따라서 외국인 독립운동가 ‘조지 애쉬모어 피치’를 알기 위해서는 그 일가를 살펴봐야 한다.

아버지 조지 필드 피치(이하, “필드”)는 1845년 1월 28일 미국 오하이오주 에이번(Avon)에서 프레몬트(Fremont) 장로교회의 목사였던 페리스 피치(Ferris Fitch, 1805~1846)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클리블랜드(Cleveland)에 위치한 아델버트 대학(Adelbert College, 지금의 Western Reserve University)을 졸업하고 신시내티(Cincinnati)에 있는 장로교 신학교인 레인 신학교(Lane Theological Seminary)에서 수학하고 장로교 목사가 되었다. 이후 메리와 결혼을 하게 되는데 메리 역시 페인스빌 여자 신학교(Painesville Female Seminary, 지금의 Lake Erie College)를 졸업한 선교사였다.

필드와 메리는 중국 선교에 대한 신념으로 1870년 11월 5일 상하이에 도착해 선교활동에 나섰다.
1870년 11월 5일 중국에 도착한 필드는 상하이와 쑤저우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고, 1888년 미국 장로교 선교회 중국지회장이 되었다. 또한 같은 해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서적을 인쇄했던 미화서관(美華書館, The American Presbyterian Mission Press)의 책임자가 되었고 매달 간행하는 종교지 차이니즈 레코더(The Chinese Recorder) 의 편집장을 맡았다. 필드의 중국 활동은 장로교 선교사로서 그의 명망을 높이게 되었다.

필드는 1893년 11월 상하이에서 한국인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필드가 처음 만난 한국인은 윤치호(尹致昊)였다. 이들은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개신교 선교와 영어 교육에 대해 대화를 나눴고, 필드는 윤치호에게 한국의 기독교 선교를 활성화하기 위해 감리교 선교사가 파견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필드와 한국인들의 본격적인 접촉은 YMCA계통의 협화서국(協和書局, The Shanghai Mission Bookstore)을 운영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한 여운형은 난징(南京)에 위치한 진링대학(현 난징대학)에서 공부하다가 1917년부터 상하이에 위치한 협화서국에서 위탁판매부 주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필드는 아들 애쉬모어를 통해 여운형을 1918년 11월 28일 상하이에서 열린 크레인(Charles Richard Crane) 주중 미국대사 예정자의 환영파티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필드는 또한 대한적십자사에 대한적십자사의 지원에 노력하였다. 1909년 7월 일본적십자사에 흡수되었으나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 8월 29일 대한적십자회 설립이 공포되며 재건되었다. 이와 함께 미국에서는 한인구제회가 조직되어 한국과 만주·중국 등지에서 일제의 탄압 하에 있는 한인 구호를 위한 모금에 나섰다. 그러나 모금과정은 부진했고 이 모습을 지켜본 필드는 대한적십자를 통해 적극적으로 모금 활동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필드는 구제회의 모금이 현실적인 어려움에 봉착하자 당시 중국에 있는 미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구호품과 의연금을 모집하여 한인들을 돕기 시작했다.

이후, 상하이에서 첫째 아들 로버트(Robert Ferris Fitch, 한자명: 司徒華林, 1873~1954), 둘째 메리 엘리엇(Mary Elliot Fitch, 1875~?), 셋째 자넷(Jeannette Griswold Fitch, 1878~1945) 등 1남 2녀를 낳았다. 필드와 메리는 얼마 뒤 상하이 근처 쑤저우(蘇州)로 이동했고, 넷째 애쉬모어(George Ashmore Fitch, 1883~1979)와 다섯째 앨리스(Alice Rayond Fitch, 1884~1971)를 낳았다.
필드의 자녀들은 모두 미국에서 학교를 졸업한 후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특히 2남 3녀 중 애쉬모어 뿐만 아니라 장남 로버트도 미국 미시간주 홀랜드에 위치한 웨스턴 신학교(Western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하고 돌아와 항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1916년부터 1922년까지 항주 기독교대학(지강대학, 현 절강대학)의 교장을 역임했다.
당시 로버트가 항주 기독교대학의 교장으로 재직하던 중에는 엄항섭·심훈 등의 한국인들이 수학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아버지 필드와 동생 애쉬모어처럼 한국인들과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⓶ 그의 아내와 자녀들

조지 애시모어 피치는 첫 아내와 사별 이후에 감리교 선교사로 상하이에 온 제랄딘(Geraldine Townsend, 1892~1976)과 1924년 결혼했다.
피치 일가 중 여성으로서 대한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제랄딘은 1892년 미국 미시간주 포레스터(Forrester)에서 프레드 타운센드(Fred H. Townsend)와 제인 로건(Jane Logan)사이에서 태어났다. 1917년 미시간 주에 위치한 앨비언 대학을 졸업하고 감리교 선교사로 중국으로 파견되어 1924년까지 감리교 청년회 총 간사로 활동했다. 이후 남편 애쉬모어와 함께 중국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했으며, 1940년대 초반 임시정부 승인을 위해 적극적인 외교 및 언론 활동에 나섰다.
1941년 제랄딘은 미국에서 조직된 한·미협회 및 한국기독교인친한회에 가입했고, 특히 미국에서 한·미협회 후견인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위해 정부와 여론을 향한 외교 활동에 나섰다. 한미협회의 중국 국민당 정부 접촉을 통한 임정승인 외교 시도도 여의치 않게 흘러갔을 때 이를 타개하기 위해 한미협회 후견인으로 활동하던 제랄딘이 나서게 되었다. 제랄딘은 한미협회의 다른 인사들과 달리 이승만 이외에도 김용중 등 미주 한인사회의 다양한 인물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미국 내 주요인사들과 접촉했다. 게다가 애쉬모어와 제랄딘은 장제스, 장췬, 궈다이치, 쑹메이링 등 중국 국민당 정부 관계자들과 이미 1920년대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결국 한미협회 인사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교섭이 어려워지자 제랄딘의 협조를 받기로 했다.
메리 엘리엇과 자넷, 앨리스 3명의 딸들 역시 중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돌아와 선교활동에 매진했다. 주목되는 점은 메리와 자넷 모두 애쉬모어가 다녔던 에이번의 우스터대학에서 공부했다는 것이다. 우스터대학은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이 다녔던 곳이기도 했다. 메리 엘리엇은 우스터대학을 졸업하고 필라델피아에 있는 필라델피아 여자 의학대학(Philadelphia Women's Medical College)을 졸업하고 중국으로 돌아와 쑤저우에서 의료 봉사활동을 했다.
자넷도 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으로 돌아와 닝포(寧波)에서 장로교 선교사인 남편과 함께 선교활동을 벌였다. 막내 앨리스는 어머니 메리가 다녔던 페인스빌 여자 신학교를 졸업하고 상하이와 미국 남부지역 YWCA 간사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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