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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Coit, Robert Thornwell(1878-1932, SP) / Coit, Cecile McCraw Woods
 작성자 : alnlom  2017-06-30 16:49:31   조회: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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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기말보고서/M0123/Coit Robert Thornwell/Coit Cecile McCraw Woods

I. 기본사항
1. 이름: Coit, Robert Thornwell (코잇트 / 한국명: 고라복 / 소속: 미남장로회)
1. 생몰연도: 1878-1932
2. 학력
1898~1902 데이비슨대학(Davidson College) 졸업
1904~1905 루이빌 신학교(Louisville Theological Seminary, 미남장로회)에서 신학 공부
1929 데이비슨대학에서 그의 한국 선교를 인정하여 신학박사 학위 수여

3. 경력
1902 애틀랜타 YMCA 대학부 간사
1903 테네시주 YMCA 학생부 간사
1908 미시시피대학(Univ. of :Mississippi) 음악과에서 성악을 전공한 세실 우즈(Cecil McCraw Woods)와 결혼
1909.3.16 남장로교 선교사로 목포항으로 내한
전남 광주선교부 소속으로 프레스톤(J.F.Preston)과 순천지역 담당, 선교부 개설에 노력
1912 남장로회 선교부에서 순천에 선교부 개설하기로 결의
1913.4 순천으로 이주, 고흥, 보성지방을 담당하며 복음전도, 교회 설립.
두 자녀(Robert, Woods) 이질로 사망
1914 미국에서 안식년
1915.5 순천으로 복귀. 구례, 광양 순회사역.
1932 귀국, 사망

4. 가족사항
Coit, Cecile McCraw Woods(부인)

Ⅱ. 선교사 소개
1. 출신과 배경
순천의 복음의 개척자로 알려진 로버트 코잇 선교사는 1878년 12월 21일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샬럿(Charlotte)에서 네 명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일찍 사망했고, 스코틀랜드 장로교 가문 출신의 어머니 줄리아(Julius Thornwell) 밑에서 성장했다.
그는 남장로교의 기독교 고등교육을 대표하는 대이비슨대학에서 1898년부터 1902년까지 공부했다. 호남지역의 선교사들은 이 대학 출신들이 가장 많다. 그리고 그는 1904년부터 2년 동안 호남지역의 개척자 유진 벨(Eugene Bell, 배유지)이 공부했던 루이빌 신학교(Louisville Theological Seminary)와 시카고대학을 오가며 신학을 공부했다.1907년 6월 6일 남장로교의 맥클렌버그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7월 2일에 해외선교사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가을에 한국 선교를 지원했지만 1908년 9월 1일에 세실 우즈와 결혼한 뒤 6개월이 지나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2. 광주스테이션에서 순천스테이션 조성까지
1909년 3월 16일에 목포항으로 입항해서 광주스테이션에 도착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비보를 듣게 된다. 광주에서 장흥 구역을 순회하던 선임 선교사 오웬(Clement C. Owen, 오기원)이 3월 27일에 폐렴으로 쓰러져 4월 3일에 사망하게 된 것이다. 1909년 7월에 열린 선교부 연례회의에서 전남 동부지역의 새로운 스테이션이 필요하게 되었고, 순천스테이션이 개설되어 코잇이 프레스턴(John F. Preston, 변요한)과 함께 담당자로 임명받게 된다. 프레스턴은 코잇이 오기 전까지 목포에서 사역하던 선교사였다.
광주에서 함께 선교구 조성을 위해 그래함병원과 광주여학교 등의 건설에 참여한 그는, 이를 기반으로 19013년 봄에 순천으로 이주하여 순천스테이션의 조성을 주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문서선교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길거리를 다니며 쪽복음 전도를 하고 전도지를 배포하면서 한국인들을 세워 복음전도자로 마을로 파송하였다. 그러나 광주와 순천은 100km나 떨어져 있어서 광주를 중심으로 오가며 전도를 하기에는 어려웠다. 그는 순천에 이미 22개의 교회와 225명의 세례 교인이 있는 것을 근거로 순천지역에 새로운 스테이션을 설치하도록 선교부에 요청하였다. 열정은 있었으나 공부할 경로가 부족했던 한국인들에게 사경회를 통해 그 경로를 열어주었다. 그는 매년 2월에 열흘씩 열렸던 중사경회를 적극 활용하였다.1912년에는 유진 벨이 안식년으로 귀국하면서 광주와 장성 지역의 30개의 공동체도 더 맡게 되었다. 그는 오웬, 프레스턴, 벨 등이 시무했던 많은 교회와 그가 새로 설립한 많은 교회를 담임으로 시무했다.
1910년부터 신분을 숨기고 부지를 구하고 다녔다. 선교사라고 알려지면 땅값을 올리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사냥꾼 복장으로 매입의 주체를 숨긴 채 땅을 매입하여 부지를 확보했다. 1911년 프레스턴은 일본으로 건너가 건립비용을 구하고 다녔다. 코잇은 순천의 세 개의 시내와 두 개의 샘으로부터 파이프를 연결해 물을 확보하고 1912년 봄에 1500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1912년 8월부터 본격적으로 공사에 들어가 1913년 4월 무렵에는 400석 규모의 순천읍 교회 예배당과 남학교와 여학교 그리고 사경회를 위한 기숙사, 병원과 시약소, 4채의 선교사 사택까지가 완공되었다. 1913년 5월 1일 공식 출범한 순천 스테이션은 전남 구례, 광양, 홍양, 보성, 여수, 순천, 곡성의 7개 군의 30만의 인구를 담당하였고, 코잇은 동부의 구례와 광양을 맡게 되었다.
코잇이 목포로부터 순천에 이르기까지 이룬 업적들을 보면 미대륙을 개척했던 개척자 정신이 엿보인다. 전남지역을 아우르며 선교사들의 사역과 건강 그리고 원주민인 한국인들의 복음을 위해 순천스테이션을 개척한 것은 한국 선교의 위대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도착하자마자 맞이했던 오웬 선교사의 죽음이 그에게 이 사명을 감당하게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선교사들이 바친 생명들은 새로운 수백 수천의 생명을 주님께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3. 구례와 광양에서의 전도
1913년 4월 코잇 가족은 프레스턴 가족과 함께 순천으로 왔다. 그런데 일주일도 안 되어 코잇은 두 아이를 잃게 된다. 악성 이질로 인하여 부인도 생사를 넘나들게 된다. 아픔 속에서도 코잇 내외는 순천을 떠나지 않고 스테이션이 잘 자리잡도록 충분히 사역한 뒤에 1914년 1년 동안 귀국하여 안식년을 보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쉬지 않았다. 전도용 대형 천막을 확보하고 선교 물자를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한 번 선교사는 영원히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아이를 잃은 충격으로 바로 휴식을 가질 만한데도 선교의 사명을 제일로 생각하여 쉬지 않고 안식년으로 돌아가서도 한국땅을 잊지 않고 내내 한국 선교를 위한 일로 충만했던 그는 진정 복음을 사랑하고 한국을 사랑했던 사명자였다.
1915년 5월 순천으로 돌아온 코잇은 구레와 광양 순회 사역에 전념한다. 1929년까지 질병으로 귀국하기까지 구례와 광양 사역에 집중했다. 그는 교회초등교육과 장막전도에 매진했다. 소요리문답을 활용한 어린이 전도에 매료되어 어린 아이들을 가르쳤고, 아이들의 10%만이 근대식 교육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나머지 아이들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역 교인들에게 교회 초등학교 설립을 적극 권우하고 선교부에 지원. 을 요청했다. 장막전도는 안식년으로 미국에 가서 준비를 시작했다. 텐트를 구입하여 한국에 들여왔고 장터 같은 곳에 설치하고 멍석을 깔아 낮에는 축호 및 개인 전도를 하고 밤에는 부흥 집회를 가졌다.
1920년에 순천스테이션의 건립 후원자였던 조지 와츠 장로가 순천을 방문했다. 순천스테이션은 지역 사회의 명물로 매일 사람들이 수백명씩 찾던 아름다운 곳이었다. 와츠는 8만 불의 후원을 추가로 지원해주기로 약속했다.
1922년에 코잇은 두 번째 안식년을 맞이하여 귀국한 후 1923년에 다시 순천으로 돌아왔다. 순회전도를 계속했고 ‘전남성경학원’에서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아내 세실이 이 때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선교사 자녀 학교 교사로 일하고 매산여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순천읍교회에서는 성가대를 지휘했다.
1920년대의 조선의 경제적 상황은 지주전호제와 일제의 수탈로 악화되고 있었다. 큰 지주가 절대적인 경제를 쥐고 있었고 대부분은 자신의 땅이 없는 소작인이었다. 일제는 미곡을 20년 동안 꾸준히 수탈했고 일본인 지주들로 경영권의 장악을 넓혀가고 있었다. 서민들의 수입은 아이들의 초등교육에 거의 소비되고 중등 이상의 교육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코잇은 교회가 중등 교육을 표준 교육의 수준으로 설립하여 실시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전도의 주도권을 한국이 이어받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양질의 인문적 교욱을 받은 고급 인력이 배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실업교육을 실시해야 할 것을 제시했다. 코잇은 한걸음 더 나아가 식민지 공교육에는 희망이 없다고 단언했다. 그것은 고대 로마의 황제 숭배와 다름없는 천황 숭배로 아이들을 이끌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를 근간으로 한 초등, 중등, 실업 교육을 실시하고 지원했다.

4. 선교의 마무리
코잇에게는 다시 가진 세 명의 아이가 있었다. 코잇은 아이들의 교육 때문에 안식년을 1년 미루고 1930년에 미국에 가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9년 2월 독감에 걸려 병세가 악화되자 10월에 미국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고 요양병원에서 투병하였다. 그리고 1932년 5월 12일에 사망하여 자신이 학창시절을 보냈던 솔즈베리에 묻혔다.
코잇 선교사가 선교 사역을 마무리 했을 때의 순천스테이션의 지경에는 1350명의 교인과 93개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인구 15만명의 구례와 광양에 30여개의 교회를 세우고 8개의 교회초등학교와 3개의 유치원을 세우고 지원했다. 부지 매입부터 건물 신축, 조경, 관리에 이르기까지 순천스테이션이 세워지고 운영되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코잇은 아이들을 잃고 부인도 위험에 처하면서도 선교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이 헌신이 큰 결실을 맺게 된 것이었다.
코잇 선교사는 오웬 선교사의 대체자 격으로 전남 선교지에 오게 되었다. 그는 이런 상황은 모른 채 한국에 왔지만 하나님께서는 오웬의 악화된 몸을 아시고 코잇을 예비해 두신 것이다. 코잇 선교사의 사역 또한 오웬과 많이 닮았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는 오웬이 맡았던 구역을 이어 받아 교회들을 순회하며 먼 지역을 오가며 전도에 힘썼다. 다른 선교사들이 자리를 비우게 될 때에도 그 몫은 거의 그가 맡았다. 현장 선교사로서 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될 때까지 그는 순천스테이션을 중심으로 전남 지역의 복음화와 교육을 위해 반평생을 바쳤다. 단 한 순간도 선교지역을 머리 속에서 떠나보낸 적이 없고, 한국과 한국민을 진정으로 생각했던 선교사였다. 그에게서 선교사의 사명과 선교사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17-06-30 16:4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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