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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Lawrence, Edna M.(1894-1973, NP)
 작성자 : 이학진  2018-12-06 11:56:58   조회: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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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 선교사 / Lawrence, Edna M.

Ⅰ. 기본사항

1. 이름 : Lawrence, Edna M. 로렌스 / 한국명 : 노연사(魯連史)
2. 생몰연도 : 1894-1973년
3. 출신 및 소속 : 미국, 북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 1920.9.13.-1940.11.16. / 1949-1953
5. 연표 (자세한 연도가 안나온 경우가 많음)
1920.9.13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세브란스 병원에서 간호원, 간호학교 교수로 활동
1923년부터 11년동안 세브란스 산파간호부양성소 제 2 소장 역임
대구 동산병원으로 옮기어 간호학교 교수로 활동 (1937-40년 사이로 추정)
1940.11.16. 일본의 외국 선교사 강제 추방령에 의해서, 마리포사호를 타고 출국함
며칠 뒤, 일본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대구 동산병원에서 일함
병원 안에 종업원이 로렌스 선교사를 공산당이라고 밀고하여 체포되어 조사를 받음
1940.11.29 무혐의로 석방되어 추방당하여 귀국함
1947 재내한하여, 로우 박사(D. S. Lowe)와 함께 대구 동산병원에서 근무
1948부터 대구 동산병원 간호과장 근무
1949 눈에 이상이 생겨 귀국하여 치료받음
1952 눈이 호전되자 한국으로 돌아와서, 6.25 전쟁 중에 서울에서 근무
1952 마펫 원장(H. F. Moffett)이 군의관으로 입대하고, 대구 동산병원이 여러 어려움을 격자, 서울에서 일하던 로렌스 선교사와 버그만 양이 함께 대구 동산병원에 와서, 부상병 치료에 헌신함.
1952 세브란스 간호부양성소장을 역임했던 에드나 로렌스(Edna Lawrence) 선교사가 동산기독병원 간호원장으로 부임해 간호고등학교 교사를 겸했다(대구 동산병원 간호학교를 복구하여 간호학교에서도 근무함)
1953 은퇴 후 귀국
1973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80세의 나이로 소천
6. 가족사항 : 기록 없음

Ⅱ. 선교사 소개: 로렌스(Lawrence, Edna M.)

1. 조선에서의 의료 선교의 시작 : 제중원

1884년 9월 22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요 의사인 알렌(Horace Newton Allen)이 서울에 도착하여 한국에서 첫 선교사로 활동을 시작한다. 그해 12월 4일 갑신정변이 발발해서 민영익이 치명적 상해를 입었으나, 알렌이 서양의 의과의술로 치료하여 3개월만의 완치가 되었다. 민영익과의 교분으로 알렌은 조정과 왕실과도 인연을 맺었고 급기야 왕실의 총애를 입고 고종의 전의로 임명되는 광영을 입었다. 이러한 때를 맞아 알렌은 미국 대리공사 G.C 포크 중위를 통해 조정에 국립 병원설립안을 제출하였다. 이에 고종은 국립 병원의 설치를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1885년 4월 10일 한국 최초의 현대식병원을 개원하였고, 이름을 제중원이라고 불렀다. 이 제중원이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이다. 제중원은 초기 한국의 중요한 선교 거점이 되었다.

2. 조선에서의 의료선교의 확장 : 여성 의료선교사, 간호사

조선에서의 의료사역이 확장되어, 병원의 연간 치료 환자수는 1만여명에 달하였으며, 하루 평균 대개 260명을 치료한 실적을 나타내고 있었다.
의료 사역이 확장되자 여성 의료선교사의 수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1886년에 북장로교 선교부는 엘러즈(A. J. Ellers)라는 여성 의료 선교사를 파송함으로 부녀과를 맡아보게 하였고, 엘리즈는 일반 부녀자나 선교사들뿐 아니라, 왕실의 왕비나 궁중 귀부인들까지 진료하면서 크게 환영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수요의 증가는 자연스럽게 의학교육의 필요성으로 연결되었다. 병원부설로 의학교육부 시설을 조정에 신청하여 1886년 3월, 공개 시험으로 16명을 선발하여 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하였으며 1899년에는 에비슨이 초대교장으로 취임하여 제중원 의학교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후 제중원은 세브란스로 발전하였고, 1907년에는 우리나라 처음으로 ‘한국 선교의 사회’ (The Korean Medical Missionary Society)를 조직하고, 의료사업에 관한 의견 교환과 의료사업 실시 방법 등을 함께 연구 하면서 이 나라 의학 발전, 그리고 연구 발표의 학술적 모임 등 새 학풍의 확립에서도 눈부신 공헌을 하였다.
특별히 1908년 3월에는 ‘한국 간호학 졸업인 협회’ (The Graduate Nurses’s Association of Korea)를 조직 운영하여, 간호사업의 향상 발전과 한국에서의 효율성 있는 최선의 간호방법 연구를 목적으로 여러 뜻 깊은 학술 활동을 전개하기도했다.

이처럼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조선에서의 의료 선교의 발판이 마련되었고, 특별히 여성 의료선교사와 간호사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간호학을 가르칠 선교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가운데, 하나님께서 로렌스 선교사를 1920년 9월 13일, 북장로회 선교사로 한국에 보내셔서, 세브란스에서 의료선교를 시작한다.

3. 로렌스 선교사가 한국에 오기 전까지

로렌스는 캐나다 매니토바 주 위나젝 시에서 태어났다. 가족들이 미국 캘리포니아 주 온타리오 시로 이주해 그곳에서 자랐고, 1917년 7월 시 인근의 포모나밸리병원(Pomona Valley Hospital) 간호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그녀는 적십자병원에 취직했는데, 이듬해 6월 육군병원에 배속되어 제 1차 세계대전 말미에는 프랑스에서 적십자사 간호사로 활동했다. 전쟁이 끝난 뒤 간호선교사로 지원한 로렌스는 1920년 9월 미북장로교의 파송을 받았다.

4. 로렌스 선교사의 사역 : 세브란스 병원에서

1917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가 출범하고 시설 및 인력이 보강되면서, 세브란스는 질적인 면에서나 양적인 면에서 모두 성장하는 계기를 맞았다. 또 1923년에는 조선총독부의 지정을 받게 되어 졸업생들이 졸업과 동시에 의사면허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간호분야는 사정이 달랐다. 1914년 10월(간호부규칙)제정으로 간호부의 면허자격이 제도화되었으나 한국과 일본의 간호부 자격에 차별이 있었고, 관리 주체는 도경무부장이었다. 1922년 (개정간호부규칙)은 관리 주체를 도지사로 변경하고 조선에서 발급된 면허가 일본과 그 외의 식민지에서도 인정될 수 있도록 했지만, 졸업과 동시에 면허를 받으려면 조선총독부의 지정을 받은 학교를 졸업해야 했다. 따라서 1920년대 세브란스병원 산파간호부양성소의 최대 목표는 조선총독부의 지정을 받는 것이었다.

이러한 세브란스의 상황에 1920년 9월 로렌스 선교사는 내한하여, 세브란스 병원에서 의료 선교를 시작한다. 1920년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된 간호선교사 로렌스는 쉴즈에 이어 11년 동안 세브란스 산파간호부양성소의 제2대 소장으로 활동했다. 일본식 간호교육을 강요받던 시기에 그녀는 교과과정 개편을 주도하여 기독교 사상에 바탕을 둔 교육이념을 관철해 나갔으며, 조선간호부회의 창립과 통합에 기여했다.

1923년부터 세브란스병원 산파간호부양성소의 제2대 소장을 맡게 된 로렌스는 교육이념과 교육과정을 정비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는 이론과 임상 지식이 풍부하면서도 기독교 신앙과 직업정신이 투철한 간호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산파간호부양성소의 목표를 “기독교인 소녀들을 신실하고 지적인 간호사로 훈련해 자기희생과 봉사정신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하고, 병원에서 효율적인 협력자가 되게 하며 궁극적으로는 많은 형태의 공중보건사업과 사회봉사에 진출시키는 데” 두었다.
세브란스에는 에비슨 교장을 비롯해 러들로, 쉴즈, 맥안리스 등 산포간호부양성소를 뒷받침할 수 있는 우수한 교수들이 있었다. 학생들도 미션계 중고등하교를 졸업한 우수한 인재들이 많았다. 또 당시 관림 산파간호부양성소가 산파과 1년제, 간호부과 2년제로 운영되었던 것에 비해, 세브란스에서는 산파과와 간호부과를 통합하여 3년제로 운영하고, 졸업 후에는 간호 면허와 산파 면허를 동시에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교과과장을 개편하고 교수진을 확보하는 노력을 체계적으로 기울인 결과, 1924년 세브란스병원 산파간호부양송소는 드디어 조선총독부의 지정을 받게 되었다.

로렌스는 조선간호부회 창립에도 혼 힘을 쏟았다. 간호선교사들은 1908년 3월에 간호선교사 조직인 재선졸업간호부회(이후 재선서양인졸업간호부회로 변경)를 조직한 바 있었다. 그 후 1920년대 들어와 간호 인력이 점차 늘어나면서, 조선간호사들의 권익보호와 국제적 연대를 목표로 하는 조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 1923년 4월 창립된 조선간호부회는 한국 최초의 간호사단체로, 서양인 간호사와 미션계통 간호학교 졸업생들의 공동단체 였다. 간호직의 권익옹호와 자질향상, 국제적 연대, 교육개혁, 대중교육 등을 목표로 했으며, 1926년에는 재선서양인졸업간호부회가 조선간호부회로 통합되었다. 로렌스는 에스더 쉴즈와 더불어 재선졸업간호부회와 조선간호부회 등의 조직과 창설에 기여했고, 이들은 국제간호협회의 일원이 되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조선간호부회는 1937년 국제간호협회 런던 총회에 세브란스 간호부 소속의 이정애를 대표로 파견하기도 했다.

5. 간호선교사로서의 그녀의 열정

그녀는 여러 교수들과 간호원들과 함께 학생들을 가르치며 동역했는데, 교수 명단과 맡았던 학문은 아래와 같다.

“Lawrence, Edna M. - Practical Nursing and English
Mrs. Ludlow - Dietetics
Mrs. McAnlis - Sweing and Housekeeping
Miss Shields - Hygiene and Care of Infants
Drs. D.B.Avison and B.Koo - Pediatrics and Contagious Diseases
Dr K.S.Oh - Skin Diseases
Dr. Paul Choi - Pathology and Bacteriology
Mr. K.Y.Lee - Pharmacy and Materials Medical
Miss Fanny Cho - Massage
Mrs. Ariguki - Japanese and Ethics“

그녀가 간호소장으로 봉직하면서, 동역했던 교수들과 그들이 가르친 학문을 보았을 때, 단순히 간호학 수준이 아니라, 한 명의 참된 간호인을 만드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가 그의 글에서 고백한 것들을 살펴보면, 간호 교수로서의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교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쓴 몇 개의 글에서 그녀의 사역이 얼마나 고되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강한 사명감과 감동으로 하나님의 사역들을 잘 감당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 글은 그녀가 ‘The Korea Mission Field’에 1928년도에 ‘Problems in the Preparation of Christian Nurses’ 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로서 후학을 양성하는 의료선교사로서 사명감과 비전을 볼 수 있다.

“좋은 여자에게 간호사보다 더 크거나 고귀한 부르심은 없다. 왜냐하면 간호사는 인간의 영육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간호사는 그녀의 기독교 신앙으로 죽어가고 고통받는 자에게 위로와 도움이 될 수 있고, 그리고 안에서 우리가 제공해야할 위로와 소망을 받기위해 마음을 열 때 그녀가 그들을 돌봄을 통해서, 그녀의 돌봄이 많은 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방법이 된다.”

그녀는 학생들을 가르침에 있어서 간호사라는 거룩한 부르심,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영혼들을 섬길 수 있는 특별한 사명으로 많은 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는 간호사의 소명 의식을 분명히 심어주는 선교사였다. 그녀는 간호학교가 기독 간호원이자 선교사로서, 기초를 단단히 하기 위해서 여러 규율들을 강하게하여 양성했다.

이러한 그녀와 동료 교수들과 간호원들의 사역은, 실제적인 열매로 맺어졌는데, 1925년 자료에 따르면, 그 해 간호학과 학생은 1학년 9명, 2학년 7명, 3학년 12명으로, 총 29명이었고, 이 중 한 명을 제외하고 전부 세례교인이었다. 그 해 3월에는 6명이 졸업하였고, 그 당시 11명의 졸업생이 세브란스 병원에서 간호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고, 1명의 졸업생이 이스트 게이트 병원에서 훈련 학교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후학 양성을 할 뿐 아니라, 실제적인 환자 치료사역도 함께 병행하고 있었고, 가르칠 뿐 아니라 현장에서의 그의 열정과 따뜻한 마음은 한국 사람들의 마음을 감화시켰고, 많은 이들이 육체적인 치료 뿐 아니라 영적인 치료를 해주며 그들을 교회로 인도하였다. KMF, 1932년 1월 글을 보면, 로렌스 선교사가 갑자기 찾아온 구걸하는 두 사람을 치료하였고, 그 중 여자 한 명은 남아서 교육도 받고 병원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예수님을 만나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변화를 기록하였는데, 그녀는 실제로 이러한 열매들을 맺는 현장 사역도 많이하였다.

그녀가 ‘KMF’에 마지막으로 글을 기고한 날짜는 1937년 5월에 ‘Nurses and Nursing in Severance Hospital’인데, 그녀가 정확하게 언제 대구 동산병원으로 옮겼는지는 나와있지 않으나, 1937년 이후에서 40년 사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세브란스 병원에서의 그녀의 사역을 보았을 때, 대구 동산병원의 어려운 상황을 듣고 동산병원에서 간호원 양성을 위해서 옮긴 것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6. 로렌스 선교사의 사역과 은퇴 : 대구 동산병원에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1940년 일본이 선교사들에 대한 압력이 더욱 심해졌는데, 결국 1940년 11월 16일, 일본의 외국 선교사 강제 추방령에 의해서, 마리포사호를 타고 출국하였다. 며칠 뒤, 그녀는 한국을 잊지 못하고 일본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한국으로 다시 들어와서 대구 동산병원에서 다시 일을 시작한다. 그러나 병원 안에 나쁜 마음을 품은 종업원이 로렌스 선교사를 공산당이라고 거짓 밀고하여 체포되었고, 일본 경찰에게 모진 고문과 조사를 받았다. 결국 같은 해 같은 달, 29일에 무혐의로 석방되어서, 추방당하여 귀국하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로렌스 선교사는 재내한 하였고, 로우 박사(D. S. Lowe)와 함께 대구 동산병원에서 근무하게되었다. 그녀는 1948년부터 동산병원의 간호과장으로 근무하며 동산병원의 재건에 힘썼다. 그러던 중 과로로 인해 눈에 이상이 생겨서, 1949년 귀국하여 치료를 받게 된다.
1952년, 눈이 호전되자 6.25 전쟁 중인 한국으로 다시 들어와서, 서울에서 근무하며 전쟁에서 다친 사람들을 치료한다. 그러던 중 대구 동산병원의 원장이던 마펫 선교사(H. F. Moffett)가 군의관으로 입대하고, 대구 동산병원이 어려움을 겪는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일하던 버그만 양과 함께 대구 동산병원에 가서, 부상병 치료에 헌신하였다. 그녀는 같은 해 동산병원 간호학교를 복구하여서 간호학교에서 근무하였고, 1955년 지병이 악화되면서 다시 귀국길에 올라, 197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8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일대기를 보면, 투철한 사명 의식으로 현장과 후학 양성을 오고가며 쉬지 않고 사역했던 전천후 의료선교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아래의 문장이 그녀의 선교 사역을 잘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된다.

‘To be a nurse is to walk with God
Along the path that our Master trod,
To soothe the achings of human pain
To faithfully serve for little gain.
To lovingly do the kindly deed,
A cup of water to one in need.
A tender hand on the fevered brow,
A word of cheer to the living now,
To teach the soul through its body's woe,
Ah' this is the way that Jesus would go.
O white capped girls in dresses of blue
Our great Physician's working through you!‘
2018-12-06 11:56:58
49.xxx.xxx.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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