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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30/Boyer, Elmer Timothy(1893-1976, SP) / Boyer, Sarah Gladys Perkins
 작성자 : 문학준  2020-07-01 13:52:58   조회: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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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명 : 보이어 (Elmer Timothy Boyer) / 1893– 1976

Ⅰ. 기본사항

1. 이름 : Elmer Timothy Boyer/ 보이어 / 한국명 : 보이열
2. 생몰연도 : 1893. 7. 28 – 1976. 4. 15
3. 출신 및 소속 : 미국, 남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 1921 – 1965
5. 연표
1893. 5. 28 일리노이 주 퀸시 근교에서 출생
1913. 루이빌 대학과 루이빌 신학교(Louisville Theological Seminary) 입학
1918.5 Louisville Theological Seminary 졸업
1918. 5. 9 루이빌 장로회에서 자격증 부여
1918. 6. 13 오그스타 소재 아칸사스 장로회에서 안수.
1918. 6 – 1921. 8 Augusta Presbyterian Church의 담임 역임
1921. 조선 선교사로 파송 받다.
1922. 전주 동부 지역 25개 교회를 함께 동역하고, 곧이어 장수·진안·무주를 맡게 됨.
1926. 10. 21 Gladys Perkins와 결혼함
1930. 4. 23 아들 Kenneth Elmer Boyer가 태어남
1931. 9. 5 딸 Elizabeth Betty Ann이 태어남
1937. 안식년 휴가로 버지니아 리치몬드 숙소에서 보냈음
1942. 6 – 1946. 9 일제의 선교사 철수 명령으로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을 듯하므로 테네시 주 녹스빌에서 가정선교 사역을 감당함
1947. 봄 광복을 맞이한 한국으로 혼자 돌아가라는 남장로교 세계 선교부의 요청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와 순천에서 사역을 시작하다.
1958. 9. 29 대전대학(현 한남대학교) 이사장으로 선출 (제 2대 이사장)
1958. 9. 29 – 1960. 10. 24 대전대학 이사장 역임
1965. 사역을 은퇴하여 본국으로 귀국
1968. 7. 21 글래디스 여사가 74세로 소천하다.
1968. 8월 중순 딸 헬렌이 플로리다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다 (30세)
1976. 4. 15 84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다.

6. 가족사항
아내 Sarah Gladys Perkins, Boyer
Ⅱ. 선교사 소개 : 보이어 (Elmer Timothy Boyer) / 1893– 1976

· 주된 사역
1) 전도사역 2) 교육사역 3) 의료선교사역

많은 이들이 ‘언더우드, 아펜젤러, 알렌’과 같은 이들은 많이 알고 있다. 하지만 미국 남장로교회 소속으로 이 한국 땅에 파송되어 사역했던 보이열은 잘 모른다. 보이열은 1921년 28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전주 선교부로 소속되어 전주동남 지역인 무주, 진안, 장수 등산간 오지에서 27년 동안 농촌 선교와 교육선교에 힘썼고, 6.25전쟁 후 순천지역에서 농촌선교와 교육선교 그리고 애양원의 원장을 17년간 지내며 음성 한센병 환자들의 정착촌 건설에 헌신했던 선교사였다. 그를 통해 무주, 순천지역의 많은 교회가 설립되었고,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았다. 그는 교육 선교에도 힘을 주어, 유능한 인재를 발굴하여 공부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도 하였다.

전도활동

(1)첫 번째 선교활동(호남 동부 지역 사역) (1921 – 1940)

29세가 되던 해, 남장로교 한국 선교부는 보이어 선교사가 전주 동부 지역 25개 교회를 순회 사역하도록 하였으며, 그로부터 2년 뒤인 1924년에는 무주, 진안, 완주 세 지역을 온전히 맡게 되었다. 그는 교회를 순회할 때 걸어다녔으며, 그 열심은 해마다 400km정도를 걸어다닐 정도였다. 그는 그 기간 동안 한 해 79명의 유아와 285명의 어른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370명을 교리 문답하는 헌신을 마다 않았다. 그는 각 교회의 열심 있고 총한 젊은 청년들을 선별하여 신학을 공부시켰고, 그들은 신흥학교를 졸업하여 일선 전도사로 교역을 하였고 평양신학교에 진항하여 모두 목사가 되었다. 1926년 글레이디스 퍼킨스와 결혼한 보이어는 계속해서 전주의 동남지역을 맡아 선교에 힘썼고 1940년 11월 미국 영사관의 철수 명령에 의해 떠날 때까지 계속 사역을 감당했다.

(2) 두 번째 선교 활동(순천지역 활동) (1947 – 1966)

첫 번째 선교 사역이 전주 선교본부를 중심으로 하는 사역이었다면, 두 번째 선교 사역은 순천 선교본부를 중심으로 구례, 곡성, 광양, 보성, 여수 등에서 이루어졌다. 순천 선교본부 사역의 대표적인 특징은 애양원의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사역을 했다는 것이었다. 1948년 여수순천 사건을 겪은 보이어는 다음 해인 1949년 5월 그는 미국 리치몬드로 돌아가 가족들을 만났고, 9월 2일 아내 글레이디스와 함께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미국에 돌아갔을 때에도 애양원의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물품을 구하려고 여러 곳을 뛰어다녔다. 한국전쟁 때는 잠시 고베로 피난을 떠났다. 그곳에도 10만 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살고 있었으므로 한국 교포 교회에서 설교하고, 중국인 교회에서도 봉사하였다.
그러다가 11월 24일 순천으로 돌아와 교회를 돌보며 애양원을 바로세우는 데 전력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순천노회 제 46회 정기회에서 노회장으로 선출되어 노회의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됐고, 삼일중앙교회와 신광교회를 비롯한 여러 교회를 세우는 데에도 열심을 다했다.

전쟁이 끝난 후 보이열은 순천지역의 노회와 농촌교회의 전도활동을 통해 교회를 개척하고, 설립하였고, 부흥하여 교회를 건축해야 하는 교회는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이 땅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의 사명은 이 땅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음을 상시시켜준다. 이 시기, 남장로교 한국 선교부는 대학을 세우기로 결의하고 광주와 전주를 염두에 두었다가 순천과 대전 등을 추가해 비밀투표를 실시한 결과로 대전에 세우기로 확정한 상황이었다. 이때에 남장로교 한국선교부는 순천대표로 보이열을 지명했고, 1954년 5월 13일부터 1962년 9월까지 재단법인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 유지재단 임원으로 활동했으며, 1959년 9월 29일부터 1960년 10월 23일까지는 제 2대 재단법인 이사장을 지냈고, 1962년 9월 17일부터 1964년까지 학교법인 남장로교 고등교육재단(재단법인이 1963년에 학교법인으로 바뀐다) 이사를 역임한다.


2. 교육활동

보이열은 당시에 한국에 먼저 온 선교사들이 주관하고 있던 많은 교육활동의 일들을 이어서 계속 진행시켜 나갔다. 그는 무주 지역에서 25년 간 복음 전하는 일과 교육사업을 위해 여러모로 힘썼다. 보이열이 순천에서 사역할 당시, 그는 시골교회들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 공부반을 통해 교회에 지도자를 세우고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적극적으로 고등성경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쳤다.

1950년 4월 6일 대전 고등성경학교가 문을 열었다. 이 학교는 1948년부터 미국 남장로교 대전지역 선교부의 설치를 위해서 선교사들이 마련해 준 일본적산 가옥인 대전시 삼성동 387번지에 있는 집에서 보이열과 인돈 선교사와 이자익 목사가 일제의 차별교육으로 인하여 많은 청소년들이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기에 대전지역을 중심으로 목회자를 양성할 수 있는 성경학교가 있어야함을 깨닫고 미국 남장로교에 적극적인 협조를 얻어 문을 열게 되었다.

1955년이 되면서 보이열은 한센환자를 위한 대학과정인 한성신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한성신학교는 1949년 말 손양원 목사, 김정복 목사, 애양원 교회 당회, 소록도 교회 당회, 상애교회 당회, 대구애락교회 당회가 연합으로 모여 한센지도자 양성을 위해 설립하기로 하였다. 한성 신학교는 전국에 있는 한센병원과 정착 농원에서 고등학교 졸업 및 동등 이상 학력 소지자 중 2-3명씩을 선발하여 치유자들에게도 목회자의 길을 열어주었다. 보이열은 애양원의 환우들의 아픔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삶을 아는 이들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함을 강조하며 교육사업을 전개하였다. 그의 이 일은 지금까지 어디에도 없었던 교육사업이었다.

3. 의료선교 활동

그는 순천지역의 한센병환자들을 위해 의료 선교활동도 하였다. 해방 후 순천지역에 마땅한 의료선교사가 없었고, 정치적인 국내의 상황이 여순반란사건과 한국전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그는 어려운 한국의 상황을 마다하지 않고 애양원의 원장직을 감당하며 지혜롭게 애양원을 유지하며 이끌었다. 그가 있었기에 한센환자들은 가장 복잡하며 힘겨웠던 시절을 복음의 사랑을 느끼며 극복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복음을 들고 애양원의 원장직을 맡아 선교하였던 그를 복음 전도자나 교육 선교사뿐 아니라 의료선교사로도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1948년 4월 11일, 원래 설립주체였던 미국 남장로교한국선교회로 애양원의 운영권이 이관되었던 시기였기에 한국인이 원장직을 맡는 것이 아니라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중에서 원장직을 맡아야 했다. 1900년 초, 광주 장로교 선교부 건물이 있는 언덕 뒤에 형편이 어려운 나환자 6명을 수용하기 위한 작은 집이 세워진 후 1924년에는 사람들이 많아져 옮겨지게 된 곳에 보이열은 미국인 목사로써 8번째 애양원 원장으로 1948년 4월 1일부터 부임하여 한센환자와 병원을 위해 일을 시작하였다.

애양원 병원의 원장직은 전문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나 의료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사람 중에서 맡아야 하는데 보이열은 미국인 목사로서 애양원 병원의 원장직을 맡는다. 그만큼 애양원의 모든 체계가 힘들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혼란 가운데서도 보이열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애양원의 1300여명의 식구들의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잠자리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백방으로 뛰었다.


4. 은퇴

보이열은 한국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그가 한국을 떠나야 했던 해는 1963년이었지만 그가 마무리하지 못한 많은 일들 때문에 세계 선교위원회에 청원하여 1년을 더 연장해줄 것을 요청했고, 그 요청은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965년까지 한국에서 선교사역의 일을 하게 된다. 그는 고국인 미국으로 돌아가 은퇴 후 미국 하이 포인트에 정착한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사역했던 한국의 친구들과 한센병 환자들의 마을과 보성마을 친구들이 너무 보고 싶어 1969년 가을 케니스 가족이 안식년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 그들과 함께 한국에 방문해 전주의 동부지역과 남원 보성마을을 둘러보았다.
2020-07-01 13:5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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