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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회-B151-Welch, Herbert(1862-1969, M) / Welch, Adelaide F. McGee(1866-1958, M)
 작성자 : 최문걸  2019-12-12 13:26:41   조회: 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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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기본사항

1. 이름: 웰취 Welch, Herbert
1. 생몰연도: 1862.11.07.-1964.04 미국 뉴욕 출생
2. 학력: 1882 브루클린 대학 및 폴리테크닉 연구소(현재 NYU 폴리)
1887 웨슬리안대학 졸업
1890 드루신학교 졸업
1903 1년간 영국 옥스퍼드대학에 유학(대학원과정)
3. 경력: 1890 이후 15년간 목회활동
1890 6월 3일 애들레이드 프랜시스 맥기(Welch, Adelaide F. McGee)와 결혼
1892 뉴욕 감리교 성공회 총회에서 감독으로 임명
1905 웨슬리안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여 11년간 근속/다른 4명의
감리교 성직자들은 그가 사회봉사를 위한 감리교 연맹을 창설, 최초의 대주교
1907-1908 오하이오 대학 회장 및 학장 협회 회장
1909-1912 감리교 사회봉사 회장 역임
1916 미감리회 감독으로 피선되어 한국 및 일본 감독으로 내한
1919 신흥우 파견하여 3.1운동의 진상을 미국에 알림
1920 영문판 <한국의 갱생> 뉴욕에서 출간
1928까지 한국 및 일본감독을 역임하고 귀국
1928~30 치츠버그연회 감독
1930 정경옥 교수와 함께 <한국감리교회 교리적 선언> 초안 작성
1932 중국 감독으로 상해에 주재 1936년 은퇴
1937. 6월 17일 미감리회 해외선교부 실행위원회 ‘신사문제’ 발표
1938 감리교 해외구제부 실무위원장 역임
1940-1948 해구 구제를 위한 감리교원원회 회장 역임(MCOR)
1950 한국전쟁시 구제, 복구, 이재민 정착사업 적극 추진
1953 이승만 대통령에게 이승만 대통령에게 대한민국 최고 민간 공로상 받음
1954 미국에서 모금한 기금으로 감신대 내에 웰치기념예배당, 이화여대 강당에
예배당 마련
1958년 미국의 각 대학에서 9개의 명예박사 학위 받음
1969.4 소천

4. 가족사항: Welch, Adelaide F. McGee(부인;1866-1985)과 2녀 도로시 엠과 엘레노어







Ⅱ. 선교사 소개: 웰취 We;ch, Herbert 1862-1969.

미감리교 감독, 교육가. 한국명 웰취. 1862년 11월 7일 미국 뉴욕에서 피터웨치(Peter Welch)의 아들로 출생. 1887년 웨슬리안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890년 드루신학교를 졸업한 뒤 1년간 영국 옥스퍼드대학에 유학하고 귀국하였다. 이때 그는 미감리회 연회에 허입하고 뉴욕주 코네티컷에서 목회를 시작, 1892년 집사목사, 1894년 장로목사가 되었고 전후 15년 동안 목회경력을 쌓은 뒤 1905년 베쉬포드의 뒤를 이어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교 총장으로 취임, 11년간 근속하면서 교육행정가로서 또 교육자로서의 수완을 발휘하였다.
1916년 5월 미감리회 감독으로 피선되자 남아메리카와 캘리포니아주에서의 감독 초청을 사양하고 미감리회 한국 감독으로 자원하여 그해에 내한, 웰취는 1928년까지 한국 및 일본 감독을 역임하였고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피츠버그 연회(1928-32) 감독을 거쳐 1932년 중국 감독으로 상해에 주재, 1936년에 은퇴하였다가 1938년 다시 보스턴 연회(1938-39) 감독 및 감리교 해외구제부 실무위원장(1940-48)을 역임하였다.
웰치는 1928년부터 1932년까지 피츠버그 주교 지역으로 재지정되었다. 1932년 총회가 끝난 후, 그는 해외로 돌아와 1936년에 은퇴한 상하이 지역의 감독으로 봉사했다. 1938년에 은퇴한 주교는 1940년까지 보스턴 지역의 주교위원회의 역할을 하도록 감독위원회의 요청을 받았다.
그는 또한 1950년 6·25 사변을 전후하여 감리교 해외 구제위원회(MCOR)를 조직, 구제사업·복구사업·전쟁이재민 정착사업 등을 추진하였다. 보육원, 불우 아동수용소, 모자원 양로원 및 직업보도소 등 신속하고도 구체적인 구제사업을 전개하여 크게 공헌하였다.
1948년 웰치 감독은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은퇴한 후 그는 여러 대학에 가서 강의를 하였다. 웰치는 수많은 기사와 책을 저술하였다.1952년 그의 90회 생일을 맞이해서는 선교부의 동의를 얻어 한국의 여선교사였던 로이스의 협조로 [웰취 기념예배당기금모금운동]을 벌였다. 그리하여 1954년 미국에서 모금한 한국교회 재건기금을 보충 서울 감리교신학대학 교사 자리에 웰취기념예배당을 준공하였고 이화여자대학강당에도 그의 기념예배당을 마련하였다. 1958년 그는 미국의 각 대학에서 9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62년 11월 6일 뉴욕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열린 그의 100회 생일 축하연 석상에서 1,500명의 축하객에게 38분간에 걸친 답사를 했다.

“……나는 작은 것들을 귀히 여기는 습관을 길렀습니다. 웨슬리는 ‘큰 책은 악이다’하며 소책자를 많이 냈습니다. 하나님이 만일 작은 것들을 버리신다면 어떻게 하늘에는 큰 별보다 작은 별들이 많고 바다에는 고래보다 작은 고기가 많고, 산에는 낙락장송보다 잡초가 많고, 세상에는 평인이 더 많겠습니까……나 자신을 과중히 생각치 말 것을 깨달았습니다……보잘것없는 내 생각이 사람들의 표준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이 세상은 하나님의 작업장입니다……여러 가지 덕 중에 나는 겸손과 동정심을 찬양합니다……나는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 계시사 인도하시고 안위하시며 힘을 주시는 성신을 믿습니다. 황금시대는 아직 우리 앞에 있습니다.”

웰치는 1916년 ME 총회에서 주교로 선출되어 봉사하게 되었는데 104세 때인 1966년 4월 감리교 감독회의에서 감독된 지 50년 기념사를 했다. 그는 1969년 106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53년 동안이 직책을 맡았다. 1969년 4월 수난주간 금요일 밤에 별세하였다. 향년 106세의 일기로 오랜 인생의 막을 내렸다.
그의 이러한 장수 앞에는 세 번의 위험한 죽음의 고비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하나는 일찍이 알래스카에서 파선 당했던 일이며, 두 번째는 일본 동경에서 지진을 겪으면서였고, 세 번째는 중국에서 공산당의 박해가 있을 때였다고 한다. 장례식은 그가 출석하던 뉴욕 연합감리회 크라이스트교회에서 거행되었다.
한편 그의 부인(Welch, Adelaide F. McGee(1866-1958)은 1890년 6월 3일 결혼하여 목회 동역자로서 헌신하였으며 슬하에는 2녀를 두었다. 그녀는 만년을 딸과 함께 보냈고 1958년 그녀의 임종을 딸이 지켰다.


1. 업적:

1) 12년 동안 선교에 힘썼다.

웰치 감독은 미국 뉴욕 출신으로 평생에 목회와 선교에 힘썼지만 특히 1916년 감독으로 선임된 후 12년 동안 한국과 일본 주재 감독으로 봉직하며 아시아 선교에 힘썼다. 웰치가 1930년에 미국총회대표로 한국감리교 통합을 위한 미국 남·북감리교회 총회에 제출한 청원서에서는 조선이 흥왕하였다고 말한다. 세례입교인 22,430인과 학습인 7,193인, 총수는 63,866인과 파송을 받은 전도인 228인이 있었다. 한국감리교회의 역사, 유동식, 기독교대한감리회, 1994, 507p


2) 한국감리교 독립 및 합동을 이루어내었다.

웰치는 한국 및 일본의 감독으로 재직하는 동안 한국감리교의 합동을 위해 노력하였다. 미국의 두 감리교회와 한국의 두 감리교회에서 합동을 위한 전권위원을 각각 5명씩 선출하였고 도한 특선위원 11명을 합친 31명에게 합동사업을 추진케 하였다. 미감리교회, 미국총회 대표중에 웰취감독이 있었다. 그리고 1930년 12월 2일 웰취 감독이 영문으로 기독교조선감리회가 건설되는 성명서를 선언하였다. 이로써 미국 교회로부터 독립된 조선 감리교회가 탄생되었다.
그리고 1930년 12월 2일 남북감리교회가 합병될 당시에는 전권위원장으로 추대되어 양주삼, 정경옥교수와 더불어 <한국감리교회 교리적 선언>을 초안하였고 한국의 자립교회는 진정한 기독교회, 진정한 감리교회, 진정한 한국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한국 감리교회의 향방을 제시해 주기도 하였다.

3) 특히 재임 중 한국의 독립운동을 암묵적으로 지원하였다.

1916년 5월 미감리회 감독으로 피선되자 남아메리카와 캘리포니아주에서의 감독 초청을 사양하고 미감리회 한국 감독으로 자원하여 그해에 내한, 한국에 주재하면서 1919년 3·1운동 때는 신흥우를 미국으로 파송해서 미국 각계와 상원의원들에게 3·1운동의 진상을 알렸으며 동년 6월부터 3개원 동안 가우처(John F. Goucher)의 별장에서 영문판 <한국의 갱생>(The Rebirth of Korea)을 집필하여 이듬해 뉴욕시에서 출간하였다.
1990년 초에는 웰치가 친일 선교사였다는 이유로 감리교신학대학교 내에 있는 웰치기념예배당의 철거를 학생들이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제시된 것이 1924년 3월 19일자<동아일보> 기사였다. 이에 따르면 당시 한국 감리교 감독이었던 웰치가 미국으로 돌아가던 배 안에서 기자들에게 “조선인은 독립 사상을 포기하였다.” “조선은 점차 안정하여 물질적으로 향상하는 중이오. 지금은 그 전의 평화를 되찾았다”는 식으로 발언하였다는 것이다. 이 소식은 국내 언론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에 흥분한 감리교 청년회원들이 웰치에게 항의하였다. 웰치는 곧바로 <기독신보> 주필 박동완에게 응답을 보냈는데 자신은 그런 발언을 한 적이 없다면서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의 편지를 실은 <기독신보>가 총독부에 의해 ‘판금조처’ 당하였다는 점에서 웰치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이 사건은 일본 측 기자가 그의 회견 내용을 의도적으로 왜곡한 데서 비롯된 것임을 판명되었다. 한국 감리교 인물사전, 장광영, 기독교대한감리교, 2002, 306p

한국과 일본 교회 감독이 된 웰치는 여러모로 그 전임자 해리스(W.M.Harris)감독과 비교되었다. 일본 선교사 12년, 일본인교회 담임 8년 경력의 해리스는 1904년 감독이 되어 일본과 한국 교회를 관할하면서 일본 편향적 정책을 수행한 대표적 친일파 선교사였다.
1907년 한국 감리교 선교 개척자였던 스크랜턴 선교사가 목사직을 사임하고 한국을 떠난 것도 해리스 감독의 편파적인 친일 정책 때문이었다. 해리스는 공개적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지지하였다. 1916년 은퇴하고 돌아갈 때 일본 정부는 그에게 2등 훈장을 수여하였다.
그러나 신학자로서 오아이오 웨슬리안대학 학장 출신이었던 웰치는 달랐다. 그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 노력하였다. 가해자인 일본과 피해자인 한국을 동시에 관장해야 했던 감독 입장에서 중립을 지키기란 어려웠다. 힘없는 자에게 중립은 버팀목이 되지만 힘 있는 자에게 중립은 가로막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웰치 감독은 중립은 한국 교회에 힘이 되었다. 해리스 감독을 경험했던 한국교회로서는 일본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만으로도 웰치 감독이 고마웠다. 보기에 따라서 ‘친한파’로도 분류될 수 있었던 웰치 감독이었기에 당시 교회 청년들에게 희망이었다. 그는 여러모로 일본보다는 한국에 가까운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3·1운동 당시 한국의 상황을 세계에 알리고, 독립운동가들을 보호해 주었다는 공적을 인정받아, 1953년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대한민국 최고 민간 공로상을 받았다.

4) 웰치는 반공주의자이었다.

웰치는 1928년부터 1932년까지 피츠버그 주교 지역으로 재지정되었다. 1932년 총회가 끝난 후, 그는 해외로 돌아와 1936년에 은퇴한 상하이 지역의 감독으로 봉사했다. 웰치는 극동에서 재임하는 동안 인권 증진을 위한 강력한 지지자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중국이 공산주의자가 되고 주제를 다루는 방법에 대한 주제는 그의 설교, 강의 및 기사의 주제였다. 공산주의 인수에 대한 그의 지식과 논평 때문에 웰치는 결국 공산주의 침략에 반대하는 위원회의 부의장이 되었다.

5)해외 구제를 위한 감리교위원회 (MCOR)

1930년 남북감리교 합동전권위원장을 맡았으며 2차 세계대전 후 미감리회 해외구제부 위원장으로 한국교회 재건에 기여하는 등 한국감리교회와 우리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웰치는 1928년부터 1932년까지 피츠버그 성공회 지역에서 봉사했으며 4년 동안 아시아, 특히 중국의 상하이 지역으로 재배치되었다. 그는 1936년에 은퇴했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보스턴 주권 지역을 감리하기 위해 은퇴 할 것을 요구 받았다. 중국에서의 경험과 접촉은 처음에 해외 구제를 위한 감리교위원회 (MCOR)를 형성하는데 있어 그의 역할을 준비했다. 이 기관은 1940년 총회에 의해 위원장 웰치 (Welch) 주교의 중국 감리 감리위원회가 제시한 제안에 대한 응답으로 1940년 총회에 의해 창설되었으며, 78세로 이미 두 차례 은퇴했다. 그는 8년 동안 MCOR의 이사로 재직했으며, 그 모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인종, 신조 또는 피부색을 구별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에 의한 기부]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을 섬김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MCOR 재임 기간 동안 처음으로 아시아에서 전쟁 난민,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 1947년 이후 팔레스타인을 위해 800만 달러를 모금한 주교는 말했다. 국제적으로. 1942년에 MCOR에서 이사회에 제안한 내용은 전쟁 구호가 난민과 이재민에게 필수품을 제공하는 것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 안도이외에도 MCOR은 재건, 재활, 난민 및 전쟁 포로 송환, 교회 및 시민 운영의 복원, 화해, 평화와 선의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에 참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오늘날 교단의 재난 대응 및 개발 기관인 연합 감리 교회 구호위원회 (United Methodist Relief on Relief)의 창립자이자 최초의 행정부 (1940 ~ 1948)는 공정한 노동법 및 노동 조직의 첫 번째 교회 승인 교회 중 하나인 감리교 사회 신조의 뿌리를 이루는 감리교 사회봉사 연맹 (1907)의 조직자이다.

한국 감리교회는 1959년 감신대 교정에 그를 기념하는 ‘웰치 기념예배당’을 건립해 뜻을 기리도록 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정보자료실, 웰치(Herbert Welch, 1862. 11. 7~1969. 4. 4) 미감리회 감독. 한국명 월치(越就)
감신대에서는 ‘한국감리교회의 아버지’라는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감신대 11월 6일 웰치 감독 전시회- 윤선주 기자작성 2007.10.31
Herbert Welch는 Marquis Who 's Who에 의해 주목할 만한 감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오늘날 교단의 재난 대응 및 개발 기관인 연합 감리 교회 구호위원회 (United Methodist Relief on Relief)의 창립자이자 최초의 행정부 (1940 ~ 1948)는 공정한 노동법 및 노동 조직의 첫 번째 교회 승인 교회 중 하나인 감리교 사회 신조의 뿌리를 이루는 감리교 사회봉사 연맹 (1907)의 조직자이다.
1916년부터 1928년까지 일본과 한국의 감리교 성공회 교회의 주교 “한국 신조”로 알려진 대중의 믿음의 긍정의 형성에 참여하였다.
웰치는 1916년에 주교로 선출되어 1928년까지 일한 일본과 한국 지역에 배정되었습니다. 아시아에서 웰치는 “한국 신조”라는 믿음의 확증 형성에 기여했습니다. 전세계의 감리교 예배에 사용된 긍정.


2. 과실

1) 신사참배

그러나 웰취 주교와 해외선교부 교직자들은 감리교 신자들이 신사참배를 하도록 지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웰취 주교는 1936년 일본에서 미국에 돌아가는 길에 한 한국인에게 “그것은 잠정적인 결정일 뿐”이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이듬해 감리교 해외선교부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확정되었다. 1937년 6월 17일자 미감리회 해외선교부 실해우이원회에서 발표한 ‘신사문제’라는 성명에 잘 나타나 있다. 한말·일제강점기 선교사 연구, 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6, 207-208p


2) 자유주의 신학

남·북감리교회가 합동하여 새로운 자치적 독립교회로서 “조선감리회”를 형성했을 때 한국 감리교회는 독자적인 신앙고백, 곧 “교리적 선언”을 발표했다. 이 교리적 선언 속에 한국 감리교회의특성과 신학적 노선이 명시되어 있다.
한국 감리교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이다. 한국 감리교의 제1회 총회에서 이틀에 걸친 토론 끝에 채택된 신앙고백이었다. 이에 대해 회의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작일의 미결안인 교리적 선언에 대하여, 성신으로 잉태함과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인한 속죄와 부활 승천과 최후의 시판에 대한 조항을 삽입하라고 장시간 토의가 있었으나 부결되고, 제8조의 ‘모든 사람에게’이하는 부록할 할 것이라는 전권위원 웰취 감독의 설명 후 …토의를 정지하고 원안대로 받자는 … 동의에 가결되다.” 한국감리교회의 역사, 유동식, 521p (기독교조선감리회 제1회 총회 희의록, 29p)

토의의 중심과제가 되었던 것은 이른바 보수적 근본주의의 5원칙에 관한 것이었다. 곧 성경의 축자적 영감과 무오설을 기초로 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대속, 몸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을 위한 그리스도의 재림 등이다. 이것을 교리에 삽입하자는 제안으로 크게 논란을 겪었다. 그러나 이 제안이 부결됨으로써 한국 감리교회는 자유주의 신학 노선을 취하게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이란 어떤 통일된 신학 체계나 어떤 학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복음의 진리를 시대의 변천에 따라 항상 새롭게 재조명하여 새롭게 파악하는 것이 개신교의 기본 원리라고 보았다. 이런 뜻에서 자유주의 신학이란 웰취 감독이 말한 ‘진보’인 신학, 곧 “시대와 지방을 따라 자라기도 하며 변화기도”하는 생명체로서의 감리교회의 신앙과 선교를 해명하는 신학이다. 따라서 교회와 교리는 물론이고, 성경에 대해서도 역사적·비평적 연구 접근이 허용된다는 것이 한국 감리교회의 신학적 노선이다.
이렇게 한국감리교는 하나로 통합되었지만 신학에서는 진보적이라고 자칭하지만 성경관에 대하여서는 넘지 말아야 될 선을 넘고 말았다. 즉 자유주의신학 경로를 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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