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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Unger, Jemes Kelly(1883-1965, SP) / Unger, Eoline Smith
 작성자 : 송기은  2018-12-04 02:16:21   조회: 1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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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한국의 교회역사를 생각할 때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단연 한국의 선교역사이다. 현재는 한국도 세계 곳곳에 선교사를 파견하게 되었지만, 초창기 한국이 기독교 신학과 신앙, 역사의 불모지였던 점을 기억하면 더욱 감회가 새롭다. 한국의 교회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그 사역과 업적 면에서 한국의 교회역사는 물론 문화, 역사, 경제, 교육 등 다양한 영역에서 한국사회와 역사 전반에 영향을 끼친 선교사들에 대한 기록들을 찾을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 중 하나는 교회역사에 그 비중 있는 기록으로 남은 선교사들 외에도 이 땅에서 자신의 삶과 사명을 다해 사역하며 살았던 선교사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단편적으로나마 Unger, James Kelly와 그 아내인 Unger, Eoline Smith를 조사하고 그 족적을 찾아가는 과정에 의의를 느낀다. 더불어, 그토록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왔고 사역하며 삶을 살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왜 비교적 소수의 선교사들에 대한 기록만이 남아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제기하게 되었다. 후에 언급하겠지만, 그 이유 중 하나가 선교사들의 이름을 명명하고 하나의 방식으로 통일해 표기하는 것에 대한 작업이 불충분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이름을 한국식 음운표기식으로 부르고 기입하거나, 또는 영문이름을 본 딴 한국식 가명으로 부르고 기록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이 과제에서는, 영문의 경우, 영문이름 전체표기 그대로 Unger, James Kelly, 국문의 경우 원가리(元佳理)로 통일해 표기하고자 한다.

2. 조사과정과 단계

(1)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확인
Unger, James Kelly 선교사의 경우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목록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이를 통해, 국내에서 사망하거나 가족이 한국에 남아있는 경우는 아닌 것으로 가설을 세우고, 국내보다는 영미권에 현재 후손이 남아있는 가능성으로 조사했다.

(2) 다양한 명칭으로 조사
기본적으로는 영문과 국문, 두 가지 방식으로 조사했다. 서론과 결론이 반복해 언급하고 있듯이, 자료의 유무와 양에 대한 점은 차치하고서도 명칭의 문제와 약력이 일목요연하게는 정리되어 있지 않은 점이 기존 자료조사 및 취합에 가장 걸림돌이 되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국문의 경우 영문이름 Unger, James Kelly를 한글표기법으로 적용한 ‘엉거 제임스 켈리’에서 시작해 축약한 형태나 외래어 오표기 가능한 범주의 음운인 ‘언거, 엉거’를 조사했고 그 과정에서 알게 된 한국식 음운의 이름표기 원가리, 한자 표기인 元佳理 등의 표현을 적용했다. 이와 관련하여 검색결과에 애양원, 애양교회 등을 추가하여 검색하였고, 여기에서 찾은 자료를 바탕으로 한센병, 순천, 매산학교, 손양원, 미국 남장로교와의 관련성 등을 추가 조사할 수 있었다. 영문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이름 전체표기인 Unger, James Kelly를 시작으로 조사하였다, 추가로 약식표현인 Unger, J. Kelly 혹은 J.K.Unger 등의 표현을 사용하였다. 영문의 경우 혹시 저작도서나 관련도서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검색된 결과에 author, writer 등을 추가하여 검색하고, South Korea, Sunchon, Lep(한센병), church, minister 등의 검색어를 추가했다. 이후에는 혹시 후손을 통한 연구가 가능한지 확인하기 위해 Jr Unger, James Kelly를 조사했다. 영문 조사의 경우, 통번역이 가능한 아내의 도움을 빌렸다.

(3) 자손연구
혹시 후손이 기록한 자료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Jr Unger, James Kelly를 적용해 혹시 부모님에 대한 기록 등이 있는지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자녀 및 후손들에 대한 부고를 찾았다. 아들 Jr Unger, James Kelly는 순천에서 출생(1926-2014)했고 한국에서 자라 평양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부모의 영향을 받아 독실한 신앙인으로 자랐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Rev. James Kelly Unger, Jr., 88, died the 21st of October at his home in West Point. Services will be at 11 AM Friday the 24th of October at the First Presbyterian Church E.P.C. Services will be conducted by Rev. Brandon Bates. Visitation will be at 10 AM Friday at the church. Burial will follow in Greenwood Cemetery. Pallbearers will be James Sonny Ming, James Hill, Langdon Unger, Jr., James Hornoll, Dr. Craig Robertson, Charles Newell. Honorary pallbearers will be members of Civitan Club and Men of the Church and Dr. John Cox.Kelly was born in Soonchun Korea, South Korea to his missionary parents, the late Dr. James Kelly Unger and Eoline Smith Unger. He received his education in Pyongyang North Korea, Ole Miss and MS State and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in Decatur, GA. He was genuinely interested in others and had a gift for making people feel special and loved. He was a devoted husband, father and grandfather. He served on the board of trusties at French Camp Academy, and on the board of Eye and Tissue Bank in Birmingham, AL; and served on the board of World Missions Presbyterian Church US. He was an active member of the Civitan Club in West Point and was a long supporter of the Lions Club in Alabama and Mississippi. He was a Veteran of the US Navy in WWII. He was pastor of several churches; Atmore, AL, Alexander City, AL, Canton, MS, York, AL and Fairfield, Al. He served interim supply at Central Presbyterian Church in Meridian, MS.He is survived by his wife of 63 years, Jeanette Ming Unger of West Point; daughter, Heather Robertson (Dr. Craig) of Florence, Al; sons, James Kelly Unger, III (Monterey) of Lynn Haven, Fl, Warren Steven Unger of Mobile, Al; loving brother-in-law, James ‘Sonny’ Ming; sister-in-law, Mrs. Langdon Unger; 5 grandchildren, Brent Unger, Brandon Unger, Anna Robertson, Day Robertson and Rachel Unger-Nasworth; 2 great-grandchildren.He was preceded in death by his parents; sisters, Martha Hill, Betty Jane Williams; brother, Langdon Unger. 

(4) 저서 및 참고도서
저서『Am I a good or a bad investment for God?』를 출판했던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현재는 절판된 것으로 보인다. 또 그가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한국에서의 한센병 사역에 관한 그의 이야기를 토대로 쓰여진 책인 『Mundongie! Mundongie!: Based on the story by Rev.J.Kelly Unger』 도 찾을 수 있었다. 이 밖에도 한국에서 선교사로서 그가 사역하고 생활했던 정황이 언급된 도서들도 있다. 『Presbyterian Survey 26』, 『Colonial Rule and Social Change in Korea, 1910-1945』, 『Baptized with the soil: Christioan Agrarians and the Crusade for Rural America』, 『Mission to Korea [한국선교 이야기]』 등.
이 밖에 국내 도서 중에서도 Unger, James Kelly가 언급된 기록이 있다. 순천지역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출간한 시집 『선교이야기』에 그의 영문이름과 그 이름을 국문 음운으로 표현한 가명인 ‘원가리’라는 명칭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자료가 그가 ‘원가리’로서 직간접적으로 언급된 자료를 찾는 근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손양원 목사의 장녀 손동희씨의 저서인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와 순교자 손양원 목사를 모티브로 한 소설인 『사랑의 원자탄』에 같은 이름이 언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을 결정적인 계기로 Unger, James Kelly가 애양원, 손양원 목사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손양원이 애양원에 부임한 것은 바로 그 이듬해였습니다. 1937년 평신 2학년 재학 시절 애양원에 부흥회 초청을 받고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이 때 나환자들이 큰 은혜를 받고 그를 모셔오기를 간절히 희망했습니다. 평신 동창 김형모 목사가 애양원 원가리(J. K. Unger) 선교사에게 손양원을 소개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손양원이 애양원에 전도사로 부임한 것은 신사참배강요가 한창 몰아치던 1939년 8월 22일이었습니다

성경 읽기와 기도하는 것, 그들은 이 신앙생활이 음식이나 약 이상의 그 무엇을 주는 것이었다. 기도에서 살고 기도에서 죽으려는 것이었다. 눈을 떠도 기도요 눈을 감아도 기도였다. 그 기도 중에는 자기네 불운을 통해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기도도 있었지만 자기네를 버린 가족 친척 사회의 구원을 위해서도 성심 성의껏 울면서 기도하는 것이었다. 근일에는 신사참배로 해서 넘어져 가는 조선 교회를 위해서 침식을 잊고 기도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처음부터 일생을 이 사업에 바친 윌손 박사와 이 수용소 교회 담당 선교사인 원가리 목사는 참 신앙적 인도자들이기 때문에 신사 불참배로 문제가 되어 경남 노회에서 문제 중인 손목사님을 맞이해서 이 교회 식구들을 철저히 지도하게 하는 것이었다. 신사참배 문제로 해서 1937년엔가 일제히 그 경영하던 교육기관인 학교들을 폐쇄 당했던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신앙 역시 같은 지도 원리였을 것이다.”

이 밖에도 손양원 목사님에 관한 책에서 원가리 목사가 언급된 대목은 다음과 같다.

손동희,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서울: 아가페 출판사, 1999), 58-59.  안용준, 사랑의 원자탄 12판 (서울: 성광문화사, 1978), 74-75, 77-81

(5) 관련기사 등
Unger, James Kelly가 언급된 국내외의 자료를 조사하던 중, 미국의 전 영부인인 안나 루즈벨트가 그의 설교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내용을 통해 그가 한국에서 21년간 사역했음을 알 수 있었다.

NEW YORK, Tuesday—A Mrs. M.G. Thomason of Wellington, Tenn., has sent me an article that she clipped from a Memphis paper. It is an interesting story, particularly to one who has been sitting in the plenary sessions of the General Assembly of the United Nations, listening to the various speeches.
The article deals with two sermons preached by a Presbyterian missionary, Mississippi-born Dr. J. Kelly Unger, who spent 21 years as head of the world's largest Christian leper colony in South Korea.
Dr. Unger wrote, in part: "The big struggle between democracy and communism is not one of arms and men and material possessions, but it is one of ideas...Communism can never be conquered by democracy as it is now being practiced unless we reinforce democracy with Christianity...An idea is always more powerful than a gun...They appeal to poor and hungry people, set up an ideal, a utopia, make all sorts of promises about dividing the wealth but they give the people nothing. In fact, they take from the people at the same time they are spreading this propaganda in secrecy, yet the people accept it."
이 밖에도 당시의 신문기사 등에 한국에서의 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1921년 광주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Unger James Kelly 선교사 연구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Unger James Kelly 선교사는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회 순천선교부 소속의 교육전도사로서 한국의 매산학교장을 역임했던 인물이자, 추후 윌슨의사를 도와 애양원 교회에서 사역하였던 목회자이다.

매산학교(매산중․매산여중)는 미국남장로회 한국선교부에서 세운 학교이며, 호남지역의 기독교선교는 이 선교부에서 주로 실시하였다. 그리고 매산학교에서 ‘신사참배 거부투쟁’이 일어나게 된 것도 남장로회의 선교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략)
당시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회에서는 직접적인 전도활동뿐 아니라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한 간접적인 선교활동도 벌였는데 남장로회 역시 그러하였다. 즉, 복음선교를 위하여 프레스톤(J. F. Preston, 변요한)․코잍(R. T. Coit, 고라복), 의료사업을 위하여 티모스(H. L. Timmons, 김로라)․그리어(A. L. Greer, 기안나), 교육사업을 위하여 크레인(J. C. Crane, 구례인)․ 듀푸이(L. Dupuy, 두애란) 등이 업무를 나누어 활동을 벌였다. 이제 매산학교의 설립에 대하여 알아볼 차례이다. 1913년에 순천선교를 위하여 광주에서 내려온 크레인과 듀푸이 두 선교사는 1913년에 매산남학교, 1914년에 매산여학교를 각각 세웠다(처음에는 은성학교라 불렸다고 한다). 이들은 선교부에서 재정지원을 받아 매곡동 동산에 교사(校舍)를 짓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여학교는 1915년, 남학교는 1916년에 각각 완공되었으나, 두 학교 모두 당국의 설립허가를 받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다른 조건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는데도 교과과정에 성경수업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국은 “귀교(貴校)가 교과과목에서 종교과목을 없애지 않고 설립허가를 신청한 것은 현행법에 위배되므로 이에 귀교에 대하여 교육행위를 금하는 바이다.”라고 하며 허가를 내주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개교 당시 남학생 75명, 여학생 35명을 받은 뒤 더 이상 학생을 받지 못한 두 학교는 마침내 1916년에 문을 닫고 말았다. 그리고 크레인은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교수로, 듀푸이는 군산 멜볼딘여학교로 각각 자리를 옮겼다.
그러던 매산학교가 다시 문을 연 것은 5년 뒤인 1921년 4월 15일이었다. 아마도 3․1운동 이후 일제가 이른바 ‘문화정치’를 내세우면서 각 분야에서 규제를 다소 완화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특히 신임총독 재등실(齋藤實)은 선교사들을 회유하는 데 많은 신경을 썼으므로 기독교계 학교의 설립도 다소 쉬워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이전에 문제가 되었던 성경과목을 그대로 두고도 자격 있는 교사를 쓰고 일정한 시설을 갖추면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에 남학교는 프레스톤이, 여학교는 비거(M. L. Bigger, 백미다)가 교장을 맡아서 학교발전을 위하여 힘썼다. 그뒤 남학교에서는 엉거(J. K. Unger, 원가리)․크레인․레이놀즈(J. B. Reynolds, 이보린) 등이, 여학교에서는 밀러(L. B. Miller, 민유수)․닷슨(M. L. Dotson) 등이 교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해부터 수업연한을 6년으로 늘리고 중학교 과정인 2년제 고등과를 병설하였다. 당시 고등과 교과과정은 성경․수신․조한문(朝漢文)․일본어․수학․역사․도화․이과․지리․창가․체조․실업학․동물․영어 등이었다. 다시 문을 연 매산학교에는 학생들이 다투어 입학하였고, 이 학교들은 순천지역의 대표적 사립학교로 발전하면서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그렇다고 하여 아무런 시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선 재정문제가 심각하였으며, 실력 있는 교사의 확보도 쉽지 않아 학생교육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1922년 초에 있었던 매산학교(남) 학생들의 맹휴사건(盟休事件)은 그러한 사정을 잘 보여준다. 즉, 고등과 1학년 30여 명이 “교원 일동을 개선하여 달라.”고 요구하며 학교와 충돌을 빚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는 차차 안정을 되찾아가며 발전을 거듭하였다.

애양리 마을은 1924년 순천선교부의 매산학교장을 역임하고 있던 엉거(J.K. Unger) 선교사가 나병원 부지 확보 책임자로 지명된 뒤 제안한 곳이다. 이전 계획 초기에는 무안군의 국유지가 후보지로 제안되기도 했지만 교통이 불편하여 순천선교부 지역내 율촌면 신풍리를 후보지로 결정하였다. 1926년 11월 이주 허가를 받아 1927년 10월 말 광주나병원의 정리를 위해 38명을 남기고 애양원으로 이주를 하였다. 환자들은 외부에 노출을 피하기 위해 도보로 밤에만 이동한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에는 여수-광주 간 철도가 개통되기 전이어서 철도를 이용할 수도 없었다.

현재까지 그 근간을 이어 오고 있는 순천매산학교 학교 공식웹사이트 기재된 매산고교, 매산여고 등 매산학교 연혁에도 그 이름이 등재되어 있다.

▶ 1910년 4월 : 미국 선교사 변요한, 고라복 목사가 순천시 금곡동 사숙(私塾)에서 개교하다.
▶ 1911년 순천시 매곡동 신축 교사로 이전하다.
▶ 1913년 9월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가 경영하는 성경을 가르치는 기독교 교육기관으로 고라복(R.T.Coit)선교사를 설립자겸 초대 교장으로 하여 사립 은성학교를 설립하다.
▶ 1916년 6월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성경정과 교수를 불허하므로 자진 폐교하다.
▶ 1921년 4월15일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 주선으로 성경을 정과로 하여 교육하는 학교로 인가를 받아 매산 학교와 매산여학교가 개교하다. 매산학교는 설립자겸 2대 교장으로 선교사 구레인 박사가 취임하고 매산여학교는 여자선교사 백미다씨가 교장으로 취임하다.
▶ 1922년 9월 이보린박사가 3대 교장으로 취임하다.
▶ 1925년 4월 언거목사가 4대 교장으로 취임하다.
▶ 1931년12월17일 재단법인 설립 인가를 받다.
▶ 1937년 9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불복하고 자진 폐교하다.
▶ 1946년 11월 1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순천노회유지재단으로 매산중학교(남녀공학)를 개교하고 9월 24일에 정식인가를 얻어 5대 교장에 고려위박사가 취임하다.
▶ 1947년 9월 1일 김형모목사 6대 교장으로 취임하다.
▶ 1949년 10월 20일 김규당목사 7대 교장으로 취임하다.
▶ 1950년 5월17일 교육법 개정에 따라 매산중학교를 중·고로 분리하여 고등학교 교명은 은성고등학교로 변경하다. 최정완 장로 8대 교장으로 취임하고 박형렬장로 8대 교장서리에 취임하다.
▶ 1952년 4월 1일 김형모박사 제9대 교장으로 취임하다.
▶ 1953년 2월 2부 고등학교를 병설하다.(3학급)
▶ 1956년 8월3일 은성고등학교를 순천매산고등학교(順天梅山高等學校)로 교명 변경을 인가받다.
▶ 1961년 1월 10일 2부(야간부), 중고등(합 6학급) 정시 인가를 받다.
▶ 1964년 5월 1일 문교부 방침에 따라 학교법인 설치관계로 학교법인 호남기독학원재단에 병합되다.
▶ 1969년 2월 24일 김오봉장로 10대 교장으로 취임하다.
▶ 1970년 2월 9일 학급증설(완성학급 24학급) 인가받다.
▶ 1974년 11월 1일 유영대장로 11대 교장으로 취임하다.
▶ 1974년 12월 2부고등학교 9학급 증설인가받다.(완성학급 12학급)
▶ 1979년 6월 6학급 증설인가받다.(완성학급 30학급)
▶ 1981년 3월 1일 정신옥장로 12대 교장으로 취임하다.
▶ 1983년 12월30일 순천매산고등학교에서 여학생을 분리하여 순천매산여자고등학교 설립인가(6학급, 완성학급 18학급)를 받다.
▶ 1986년 9월 17일 2부 전학급이 주간으로 전환되다.(완성학급 36학급)
▶ 1987년 3월 1일 김홍규장로 13대 교장으로 취임하다.
▶ 1994년 3월 1일 장정동장로 14대 교장으로 취임하다.
▶ 1994년 9월 1일 유상인장로 15대 교장으로 취임하다.
▶ 1999년 9월 1일 임주택장로 16대 교장으로 취임하다.
▶ 2007년 9월 1일 장차종장로 18대 교장 취임하다.
▶ 2008년 2월13일 제 57 회 졸업(졸업생 371명 연인원 23,438명)

또한 그는 손양원 목사님이 애양병원의 목회자로 취직할 당시 부원장이었던 인물이다.

1939년 7월 14일 손양원은 전라남도 여수군 율촌면 신풍리 231번지 율촌 애양원 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애양원은 광주시 봉선동에 있던 한센병 집단치료소가 여수의 한 바닷가 마을로 1927년에 옮겨온 것이었다. 손양원이 이 나환자 병원의 목회자로 취직할 당시 원장은 윌슨(Robert M. Wilson, 우월순) 의사로 그는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회 순천선교부 소속이었다. 부원장인 선교사 엉거(James K. Unger, 원가리) 목사는 같은 선교부 소속 교육선교사로서 윌슨 의사를 돕고 있었다. 두 선교사는 일찍이 애양원 교회에 한국인 목사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1929년, 광주 금정교회를 담임하던 김응규 목사를 청빙했다. 손양원은 선교사 엉거 목사와 김응규 목사에 뒤이은 애양원 교회 제3대 목사였다. 그가 목사 안수를 받은 것은 해방 후인 1946년 3월 경남노회에서였다

동창 김형모 목사로부터 당시 전도사였던 손양원을 소개받아 애양원에 부임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손양원이 애양원에 부임한 것은 바로 그 이듬해였습니다. 1937년 평신 2학년 재학 시절 애양원에 부흥회 초청을 받고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이 때 나환자들이 큰 은혜를 받고 그를 모셔오기를 간절히 희망했습니다. 평신 동창 김형모 목사가 애양원 원가리(J. K. Unger) 선교사에게 손양원을 소개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손양원이 애양원에 전도사로 부임한 것은 신사참배강요가 한창 몰아치던 1939년 8월 22일이었습니다.4)
1938년 27차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하고 신사참배 바람은 전국에 더욱 강하에 불어닥쳤습니다. 이런 애양원의 평온한 삶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941년 미국시민들의 추방령이 내려지면서 윌슨 박사와 크레이그 박사가 애양원을 떠나야 했고 탈메이지 부부가 애양원을 지켜야 했습니다.
애양원의 모든 법적 권한을 넘기기를 강요하는 일경에 맞선 탈메이지 부부는 1941년 12월 7일 일경에 의해 강제로 감옥에 가야 했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탈메이지 박사는 두꺼운 담요와 두툼한 옷을 입고 경찰을 따라나섰습니다. 가로 6자 세로 10자 감옥에서 1941년 12월 8일부터 1942년 4월 9일까지 121일 동안 그는 투옥되었고, 가진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재산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결국 일경은 포기하고 그를 출옥시켜 1942년 8월 뉴욕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선교사들의 분명한 태도는 손양원에게 적지 않은 도전과 용기를 제공했을 것입니다. 윌슨 박사는 전후 한국에 돌아와 1948년 4월 1일 미군정으로부터 애양원의 행정권을 이양 받아 애양원 복구에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의 노고와 헌신을 기념하여 애양원의 영문 이름을 “윌슨 나환자 촌”(R. M. Wilson Leprosy Colony)로 붙였습니다.

주목할 점은, 전도사였던 손양원목사가 1939년 7월 14일 여수애양원교회에 부임하여 원가리 목사에게서 목사안수를 받고 8월 23일 부터는 애양원교회 당회장을 인수받았다는 점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후 손양원 목사가 이후 경남노회에 의해 정식으로 공식적인 목사안수를 다시 받게 되었는데, 손양원목사의 안수가 1939년 7월 Unger James Kelly 선교사에 의해 비공식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히는 자료를 볼 수 있었다. 이에 근거하면, 공식 안수는 1946년 제47회 경남노회에 의해 이루어졌다. 한국교회사에서 중대한 한 획을 그은 손양원 목사가 목사안수를 받고, 애양원에서 사역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 결정적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설명하는 자료가 충분치 않다는 점은 조금 아쉬운 일이다. 역대 매산학교 교장들에 대한 자료에서도 4대 교장이었던 그의 사진만이 등재되어 있지 않은 점 또한 아쉬웠다. 이후 그는 일제에 의해 추방당했다가, 해방 후 다시 한국으로 복귀하게 된다. 이후 1951년 미국에 있었던 정황도 확인할 수 있다.

4. 의의 및 한계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과제 조사 과정은 실제로 교회사에 큰 획으로 기록된 인물들 외에도 무수한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사역하고 삶을 살아냈음을 재차 상기하는 과정이 되었다. 한국교회사의 현장은 우리 민족은 물론이고 국내에 있던 선교사들에게도 생사를 가름하는 도전의 시간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듣다. 그 사역현장은 곧 파란만장한 한국역사의 현장이기도 했기에, 한국 역사의 특수성과 기록적, 언어적 한계는 물론이고 노회와 교회법 등에 있어서도 예외적인 상황이 적용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현재에도 이름이 통일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거나 기억에 의존한 약식 이름, 가명 등으로만 남아있는 선교사들이 있으리라고 본다.
Unger, James Kelly, 원가리(元佳理) 선교사의 경우에도 다양한 기록방식과 명칭으로 그에 대한 자료가 분산되어 있는 점, 그리고 사진 등의 시각적 자료가 부족한 점, 그를 언급하기 위해서는 손양원목사의 2중 목사안수 등이 거론되어야 하는 점 등, 사역의 방식이 독자적이기보다는 윌슨목사를 돕거나 교장을 역임하거나 하는 등의 다소 협력적인 방식인 점 등에서, 한국교회사의 기록면에서는 거의 역할과 이름이 다소 약화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 아내인 Unger Eoline Smith의 자료를 찾기 쉽지 않았던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2018-12-04 02:16:21
49.xxx.xxx.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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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사 조사 과제시 참고할 사이트 소개   한국기독교사연구소   -   2020-04-16   8489
  [공지] 2020년 1학기 내한선교사 수정 및 보완과제 안내 (1)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20-04-16   8563
  [공지] 2019학년 2학기 한국교회사 퀴즈와 독후과제   평양대부흥   -   2019-10-10   19924
  [공지] 한국교회사 과제 제출관련   평양대부흥   -   2019-07-02   29429
  로그인 '비밀번호 찾기' 관련 안내   평양대부흥   -   2018-12-06   56341
  [주의 사항] 첨부파일의 이름 작명시 주의 사항 (2)   평양대부흥   -   2017-05-18   8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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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3 / Hodges, Cecil Henry Noble   조반석     2020-07-0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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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54/ Torrey Reuben Archer III   오준석     2020-07-0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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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_Kinsler Helen C_18_3-3_정경철   kurios     2020-07-0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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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 / 26 / Birdman, Ferdinand Henry   김철중     2020-07-0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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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 선교사 / 09 / Irwin, Ada J (1)   김형만   -   2020-07-04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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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본 다시 올립니다.] 내한선교사/3학년2반25번/Hankins, Ida(1882-1964, MS)   노경현     2020-07-03   28
1572
  내한선교사/25/Lowder, Rosa May/김주람   김주람     2020-07-03   25
1571
  내한선교사_3학년3반_26(Lowe DeWitt S)_정진솔   정진솔     2020-07-03   53
1570
  내한선교사 / Hillman Mary R   이모세     2020-07-03   25
1569
  내한선교사 / 19 / Koons, Edwin Wade   권지훈     2020-07-03   33
1568
  내한선교사/ 46/ Steadman, Frederic W   오건호     2020-07-03   29
1567
  내한선교사/52/Levie, James Kellum(1890-1977, SP)   정주영     2020-07-03   23
1566
  내한선교사 / 22 / Lane, Harold W.   이유환     2020-07-03   21
1565
  내한선교사 / 12 / Austin, Christian Lillian(1887-1968, SP)   장성철     2020-07-03   30
1564
  내한선교사 / 1 / Dodson, Mary Lucy(1881-1972, SP) 도마리아   김찬양     2020-07-03   30
1563
  내한선교사 / 3-1 / 69 / Earl Cranston / 황예준   황예준     2020-07-03   33
1562
  내한선교사 / 67 / Crane Janet 미국 SP   프로이스     2020-07-03   20
1561
  내한선교사 / 68 / Crane, John Curtis / Hedleston Florence Crane   홍성지     2020-07-03   42
1560
  내한선교사 / 72 / Woodberry, Earle J.(1892-1982, NP) / Woodberry, Ada W. Pierce(1892-1995, NP)   이상혁3반     2020-07-03   46
1559
  내한선교사 / 19 / Goodwin, Charles (1913-1997)   김윤형     2020-07-0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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